[녹취록] 6강 (불)투명사회에서 미끄러지는 난민들: 배설의 정신분석학

발제 _(불)투명사회에서 미끄러지는 난민들: 배설의 정신분석학

맹정현(서울정신분석포럼)

 

6강강연자

 

 

 

 

 

 

제목이 ‘불투명사회에서 미끄러지는 난민들’인데요.  사실 저도 이 제목을 잘 이해를 못했어요.  제목이 되게 난해하죠. 제목이 무엇이건 저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에요.  그건 가족입니다.  다 가지고 계시죠?  가족이요. 가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거라고 생각해요.

뭐 인간에게는 다양한 대상들이 있죠.  가령 호주머니를 집어보면 다양한 물건들이 있죠.  동물과 달리 인간은 주머니가 있어요.  강아지한테는 호주머니가 없죠.  이게 바로 인간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죠.  인간들은 주머니에 뭔가를 잔뜩넣고 다니는 동물이죠.  그리고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이 그냥 물건이 아니구요,  흔적들이라고 할수있죠.  그러한 대상들과의 관계속에서 자기자신이 되어가겠죠.

저는 그 중 가장 중요한 대상이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출발점이 가족입니다.  다른 대상들과 달리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대상은 아니죠.  아무리 딸이 예쁘다고 해도 딸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는 없죠.  그렇지않나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것이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 주머니에 아이를 넣고 싶어 하지만넣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아이는 주머니에 넣을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을 늘 되찾아야하는 대상처럼 간주하고, 가족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프로이트는 가족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중요하다면,  왜 중요하냐면 하나의 울타리가 되고,  환경이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인간에게 가족이란 안락함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기쁨과 안락을 주기 때문이 아니고,  가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잃어버린 대상입니다.  내일이 어버이날이죠.

어머니, 아버지 집에가면 계시죠. 하지만 사춘기 이후로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의 육체를 만져본 적이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봅시다.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사춘기이후로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먼 존재죠. 바로 옆방에 있지만, 과연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가령 부모님께 안겨본 적이 언제인지. 포근한 환경처럼나에게 절대적인 안정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옆방에 있지만 잃어버린 대상들

‘잃어버린 대상을 찾기위해 누군가를 찾게 되고, 살아가면서 만나는 대상들에는 우리가 유년기에 잃어버린 대상들-어머니 아버지-의 흔적들이 새겨지더라.’라는거죠. 아주 특이합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도 만나면 만날수록 아버지, 어머니의 흔적을 보게되죠. 나는 애초부터 아빠같은 사람만 만날거라는 사람도 있을 거에요. 어쨌든 내가 지금 누구를 만나건,  그 대상들에는 내가 잃어버린 대상들의 흔적이 새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같은 여자는 절대싫다는사람도있고, 아빠같은 사람도 절대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안될까요?
엄마가 왜 싫은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엄마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죠. 아빠같은 사람이 싫어요. 아빠같은 사람만나기 싫어도, 아빠같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빠같지 않은 사람은 이상형이니까요. 이상형은 찾기 어렵죠. 좌절을 겪을수록 내가 만나는 대상에게서 그 대상을 보게되고, 누구를 만나건 만나고 싶어하는, 만나고 싶지않아하는 대상을 볼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같은 사람은 싫어’라는 사람도 역시 꿈꾸는 엄마가 있는 것이죠.

오이디푸스컴플렉스는 반대성의 부모를 사랑하고 자신과 동성인부모와 경쟁관계에 들어가는 것이죠. 하지만 아빠가 좋아서 엄마가 싫은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대상들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존재더라. 바깥에서 엄마같은사람을 찾고 아빠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프로이트는 대상의 발견은 늘 재발견일 뿐이라고, 결국 다시 (대상을) 보는 과정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즉,  새로운 대상을 만났다고 좋아하지만, 사실 같은 사람이더라라는 거죠. 알고 보면 비슷한 사람. 비슷하게 연애하고 사랑하고,  더 나가서 비슷하게 실패하게 됩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실패하죠. 연애방식은 늘 같은방식으로 귀착됩니다. 새로운 대상을 만나는 건 가능하지만, 새롭게 연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예를들어, 나는 아버지 같은 남자는 정말 싫다,  아버지같은 남자를 만나지 않게 평생 노력하고 결혼하죠.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신이 꿈꾸던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행복해야되는데, 속았다. 라고 합니다. 아버지같지 않아서 선택했는데 아버지 같더라.  알고보니 혈액형이 같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얼보고 사랑하는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고싶은 무언가가 있어요.  그것을 무언가에게서 보고 사랑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새롭게 사랑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우리는 ‘낚여있었던 것’이죠. 우리에게 젖을 주던 사람, 우리를 안아주던 사람,  미소짓던 사람들 부모라고 부릅니다. 사실 우리가 태어났을 때는 부모가 뭔지 몰라요. 엄마, 아빠는 자기뱃속에서 태어났으니까  ‘우리아이’라고 하지만, 엄마•아빠는 당연한 것이 아니죠. 엄마라는 정의를 아이가 알고 있을까요?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낚여있었어요. 그들이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안아주고, 먹을 것을주고, 필요한 존재를 주기때문에 낚여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이라는게 왜 중요한가요. 가족은 우리를 보호하는 환경이라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유년기에 만족을 주던 대상이지만 더 이상 만족을 줄 수 없는 잃어버린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대상인 가족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하나의 핵심적인 축이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환경을 만나지만, 그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 질문해봅니다.

 

프로이트에게는 (가족이란)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가족이 타자와의 관계의 출발점이고, 유아로서의 경험이 있다는 것.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엄마, 아빠가 되는 과정의 중심에는 나의 유년기의 부모와의 관계가 있어요.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이를 낳는다는 게 아니라, 나와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유년기에 맺었던 그 관계를 다시 반복하는 체험입니다. 아버지가 되는 경험이란 아버지를 낳았다고 아버지가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가 무서워서일까요? 그것은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쉴 수있는 곳이 아니라쫓겨난 곳. 쫓겨난 곳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더라. 원초적 환경으로부터 우리는 쫓겨났어요.
프로이트는 가족이란,  한편의 소설, 한편의 로맨스라고 했습니다. 가족에 대해 온갖 이야기들, 불평, 엄마•아빠에 대해이야기하는 것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지어낸 이야긴가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점들, 친구들에게 어떻게 (가족에대해) 이야기하는가도 생각해보세요. 부풀려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까지가 현실인가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객관적일 수 없 고 소설 속에서 활동하는 가족입니다. 가족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는한 그것이 불평이 건, 긍정적이든 간에 상상적 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의 허구, 소설이죠. 가족에 대한 소설들을 다가지고 있어요.  우리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설인 사람은 없죠.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연애하고, 날 낳았는지모르지만, 우리는나름대로의 네러티브-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게 없다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왜 다른 집이 아닌 우리집에 살고 있는지 이해가 불가능하죠.  그런 허구가 우리가 살아가며 필수적인 허구 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이 가족 속에. 환경 속에 뿌리박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소설로서의 가족입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가족뿐만 아니라 관습, 규칙은 픽션입니다.  가령박근혜를 뽑고, 그에게 권력을 준 것은 픽션이죠.  타고난 권력이 아니라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되죠.

우리가 가족 속에서 부여한 역할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날 낳아주신분, 그것을 본 사람도 있어요. 어머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심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애매모호한 존재죠. 생물학적 관계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아버지의 관계는 증명이 불가능했습니다.  DNA 검사라는 것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었습니다.  아버지라 믿기 시작하면 아버지이고, 증명이 불가능했어요. 그것(=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죠? DNA 검사라는 것, 과학이 검증한 것은 사실이 아닌 픽션을 검사한 것입니다.  아버지에 걸맞은 힘을 부여하고,  소설을쓰고,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과학이 검증해 줍니다.  가족은 한 편의 소설입니다. 어떤 소설인가요? 우리가 잃어버린 대상들에 대한 소설이더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잃어버리고, 어떤 대상을 잃어버린지,  소설을 쓰고 있어요.

가족로맨스라는 글에서 프로이트가 이야기해요.  가족로맨스에서 (사람들이) 다양한 공상 을하더라는 거죠.  아이들이다양한 공상을 하고, 어떤 공상을 하냐면 현실의 부모가 아니라 (자신은) 위대한 부모의 자식이라 믿어요. 왕자, 공주, 버려진 자식인데 보잘것 없는 부모와 살고있는, 이러한 공상을 하더라는 거죠. 누군가 한번쯤은 (상상) 해본 소설.  그냥소설이 아니라 주로 ‘사랑과전쟁’에 나올 법한 막장극이죠. 가족로맨스의 전형이 바로 오이디푸스컴플렉스입니다.
컴플렉스란, 잃어버린 대상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렸고,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어떤 네러티브-서사-에 넣어서 결정할지, 우리의 육체를 만족 시킬 수 있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조율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욕망, 사랑하는 어떤 포지션을 갖게 됩니다. 오이디푸스컴플렉스는 나 자신의 충동을 어떻게 처리하고 그 충동을 대상에 부여하며, 성적정체성 조차 결정짓게 도와주는 소설입니다. 그러한 소설이 없으면 이 세상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오이디푸스컴플렉스는 쾌락을 가지고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노하우를 제공하는 겁니다. 오이디푸스컴플렉스가 작동하지 않으면 욕망이 교란되며, 충동이교란되며,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즐겨야할 지 모르게 됩니다.

본론으로들어가서, 가족이 한편의 소설이라면 시대와 사회에 따라 그 장르는 바뀔테죠. 시대가 바뀌면 유행장르도 바뀌고 가족이라는 장르도 바뀝니다. 일종의 막장극소설이에요. 가족은 변하지 않습니다. 기러기아빠?  아이들 공부시키겠다고 아이들을 싸서 엄마가 날라버림 막장스러워요. 프로이트 뿐만아니라  15년 전까지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공부시키기 위해 가족이 충분히 떨어져 있어도 된다는 정당한 이유가 만들어지고,  (이 이유가) 정당하다 생각합니다.  시대가 그런 이유를 제공하고 있어요.  소설을 쓰고 있다면, 그 소설이 바뀌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막장스럽기는 마찬가지예요. ‘어떤 막장극 속에 살고 있는가’가 본론이죠. 가족이라는 것이 소설이라면, 어떤 소설속에서 살고 있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잃어버린 대상들에 대한 소설로서의 가족은 기성세대(에게)는 공감가능한 가족입니다. 고전적인 치정극에 익숙한 기성세대.

아이들은 어떨까요.?  우리아이들은 어떤 가족을 꿈꾸며 살고 있는가 어떤 가족 속에서 살고 있는가.  같은 소설을 읽는다해서 기성세대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어머니와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을 싸서 날라버린 엄마와 아버지. 아버지가 무너지고, 중심의 역할, 권위적인 역할(이 무너집니다.). 권위와 힘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눠주는게 아니라 자판기가 되어 버렸어요. 아버지는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 자신이 번돈은 외국으로 부쳐야되고, 자신이 즐기는것을 제한합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하나의 자판기가 되어가고 있어요. 아버지의 몰락. 하지만 어떤 아버지가 몰락한 것일까? 라는 질문 제기가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몰락,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늘 몰락하는 사람이에요. 사실, 앞서 이야기한 기러기 아빠의 원조는 1970년대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도, 이 구조만 조금 바뀌었고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생산해내는 이익을 먹고 성장하는 아이들이란 (소설은) 바뀌지 않았어요. 이 역시 기러기아빠와 다름없고, 형태만 바뀌었고, 아이들과 떨어질 수밖에 없음은 예전에도 유명했던 소설 네러티브입니다. 떨어져 있지만 가치있는 존재. 여기 없지만.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분리기능을 수행하는 아버지였어요. 아버지는 여기없고, 중동에 있고, 아버지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 만나게 되는, 집안에서 아버지와 만나 시선교환, 대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언제입니까? 아버지는 집에있지만, 집에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죠. 바깥에 있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클래식한 가족컴플렉스 속에서 아버지는 하나의 잃어버린 대상입니다. 특이하게도 아버지는 그렇게 부재함으로써, 여기없음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우리에게 드러내더라는 것입니다. 부재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것이 아버지의 정의입니다. 가족 속에서도 부재하는 존재이며, 같이있는 존재가 아니고,  친근한 존재가 아니죠. 그렇게 (아버지는) 아버지의 존재를 우리에게 부가 합니다. 부재함으로써 존재를 들이대는 사람이죠.

국제시장을 보면, 아버지는 무엇인가. 초반에만 나오고 거의 등장하지 않죠. 부재하는 사람. 이미 죽은 존재. 죽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하나의 빚이 되어버려요.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아버지의 존재가) 부재할 수록, 아버지의 존재는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되는 방식이죠. 우리는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가되어 갑니다.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날아버린 가족은 어떨까요. 기러기 아빠들에게 뒤바뀐 것은 부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부재함으로써 존재를 들이미는 기능이 불가능해집니다. 옛날과달리 같이 있지 않으며 같이 있을 수 없어요. 어머니와 아이들이 너무 근접하고, 가까워집니다. 아이와의 관계가 제 3자-아버지-를 통해 매개된 관계가 아닌, 아버지를 매개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유착된 관계로 형성됩니다. 아이를 데리고 날라버림은 기러기아빠 뿐 만아니라,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날라버리는 사람들만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모두가 기러기아빠입니다.

현대적인 가족형태에서 아버지의 형태는 격리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아버지는 훨씬 더 가까워집니다.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가 되고 싶어하죠. 그런데 아버지가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청바지도 입고, 영화도 보고, 스케쥴을 잡으려고하면 아이들의 스케쥴에 맞춰야하고, 대기를 해야합니다. 아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대기를 해야하는 아빠. 기러기들과 다르지 않아요. 분리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며, 우리는 초근접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원초적인대상으로서의 어머니가 지나치게 근접하게 됩니다. 대상을 잃어버릴 기회를 아이들이 갖지 못해요. 대상을 잃어버릴기회를, 가족을 잃어버릴 기회를 제공받지 못합니다.
가족이란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데 가족이 축이 되고, 가족이라는 것은 (인간이) 관계를 통해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는 밑거름이며, 출발점입니다. 그 조건은 가족을 잃어버려야하는거죠. 잃어버린 대가로 우리가사회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관계가 근접하고, 아이들은 어머니를 잃어버릴 수 없게 됩니다. 원초적 대상을 잃어버릴 기회를 만들지 못해요. (이것이) 왜 중요한가. 원초적인 대상이 지나치게 근접했기 때문입니다. 유아기시절에 날 만족하게 해주던 대상이 지나치게 근접해 있다는것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상황에서) 아이들은 주체가 될 수 없어요. 아이들은 엄마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엄마들의 요구대로 (아이들에게) 요구를 관철시키고, 움직여지는 대상들이 된 거죠.

고전적 오이디푸스(컴플렉스)가 대상을 잃어버림으로써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과정이지만, 아이들은 이 기회를 잃어 버립니다.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할 수록,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수록, 아이들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주저앉히는 거죠. 욕구충족이 사랑이라 생각하고,  많이주고, 욕구 충족해주고 싶어하지만, 욕구를 충족시킬수록 아이들은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더라는 것 이죠. 그 스스로 자신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육체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충동은 만족 시킬수록, 내가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가령 성적경험을 할때 주체가 아니라 우리를 잃게되고,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육체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되는 체험이 아닌, 그것이 되는 체험. 그것이 되며 자기자신이 되기도 하죠. 주체적인 공간을 확보하기도 하지만 충동은 만족시킬 수록 만족되는 대상은 주체가 아닌 대상(이됩니다.).

충동의 역설
그러니까 아이들이 원초적 대상과 지나치게 근접하고, 아이들을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만듭니다. 왜 우리시대(에)는 과잉행동장애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자신조차 가누지 못합니다. 초등학교에 많아요. 집중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고, 주의력이 산만합니다. 이것을 과잉행동장애라 말해요. 몸은 성장했지만,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20년전에만해도 볼 수 없었는데 왜 많아졌을까요? 그러니까 충동의 만족이 과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초적대상과의 근접성 속에서 충동이 되고, 충동적 존재가되고, 너무 대상이 근접할 수록, 만족시키는 대상이 가까워질수록, 분간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체와대상의 역할을 분간하지 못하게 됩니다. 대상과의 관계가 가까울수록 대상이 되고 자신과구별이 안 되고, 감정의 정동이 안됩니다. 나의 감정인지 상대의 감정인지 구분이 불가능해지죠. 가령, 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인데, 거리를 두지 않으면 쉽게 잃어버립니다. 아이도 우울해지고, 분간할 수 없게되죠. 분간이 불가능(한상황). 좋은 감정인지, 나쁜 감정인지,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 분간이 불가능해요. 점점 가까워 질수록 이상하게 거리가 있을 때는 사랑하는 것이 기쁨이었어요. 좋아한다는 것 역시 기쁨을 주는 것이죠. 가까워 질수록 이상하게 미워져요. 사람이 미워져요. 미움과 사랑이 구별이 안 되고 양가감정(이생깁니다.). 가까워질수록 감정은 불투명해져요. 좋아하는 건가, 싫어하는 건가 분간이 안 되고, 자신의 감정상대의 감정인지 구분이 안돼요. 기대할 수록 미워하게 됩니다.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감정은 불투명해집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가까운 초근접사회에서 대상과 가까워지고,  잃어버릴 기회가 없어지고, 불투명해지고, 과잉행동이 나타나고, 아이를 압도하게 됩니다. 정서적 불투명이 아이들을 지배하죠. 정신의 구조에 기인한 아이들이 현실적으로 처한 어떤 상황에 의해 배가 되고 있어요. 현실적인 상황이 헷갈리는 상황이죠. 현실 자체가 점점 더 헷갈릴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부모에게 아이는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어가고 있고 아이돌, 신이되어 가죠. 그러니까 아이들이 수적으로 적어지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커지고, 가치가 높아집니다. 집에 가면, 아이들이 있으면, 집의 구조가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가 없이 관계구축이 됩니다. 아이들이 값이 되어 버리죠. (하지만) 바깥에 나가면 아이들은 남의 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내 아이지, 남의 아이가 아니에요. 부모에게 아이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는 내 아이를 다른 아이들을 경쟁관계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투자하는 만큼 기대할 수밖에 없고, 많은 것들을투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당연히 경쟁구도 속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황금이지만 밖에서는 똥이되더라는 거죠. 어쨌거나 황금과 똥사이에서 아이들은 어쨌거나 당혹스러울수밖에 없습니다. 황금인지 똥인지분간이 불가능(한) 여기에서 생존한다는 것. 잘 산다는것은무엇일까? 미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어요. 과잉행동장애가 괜히 있는 것이아니죠. 이것이 현대의 가족소설입니다.

요점은 국가는 국가의 일, 학교는 학교의 일, 가족은 가족의 일이 있습니다. 본인 입장에서 가족은 욕망을 전수하는 장이에요. 아이들로부터 지식을 욕망할 수있게, 욕망을 전수하지만, 가족은 모든것을 떠맡게됩니다. 더이상 시민을길러내는데 관심이 없어져요.

시민이사라지고 소비자만 남은 소비자가 왕인시대. 갑과을의시대. 사실 시민이 되기위해 많은피를 흘렸어요. 많은피를흘리고 우리는 반면 ‘현대(에)는소비자가된다.’라는 핑계안에서 부조리함을 다시 경험하는 시대라 할수있습니다. 어쨌든 현대의 가족소설에 대해 이야기했고 여기서 마치기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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