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 2강 한국의 군사주의와 반군사주의

발제_ 군사주의의 축을 이루는 ‘징병제’와 반군사주의의 상상

권인숙


“내 젊음 조국에.”1) 국방부의 홍보 영상은 때로 낯 뜨겁고 유치하다 싶을 만큼 애국의 클리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홍보 영상은 ‘대중적으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런 영상을 보고서 누군가가 “저게 뭐야? 저건 남성성, 여성성을 이분화하고 있어.”, “여성을 지켜줘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 있어.”라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 동감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우리는 ‘평범하게’ 군사화된 사회에 압도당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 ‘군사주의’라는 말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일상이 된 것은 ‘당연한 것’, ‘원래 그런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군사주의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의 지위를 갖고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의미의 방벽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닥쳐 있는 파국의 상황을 ‘해방적 파국’으로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군사주의의 일상화’라는 화두를 단번에 꿰뚫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징병제’의 문제일 것이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절대화된 명제. “모든 대한민국의 남자는 군대에 간다.” 이만큼 많은 사람이 군사독재에 항거했지만, 또 이만큼 많은 이들이 학생 운동의 열기를 이어 나갔지만 누구도 징병제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회에서 징병제가 이슈의 중심으로 처음 떠오른 것은 1997년에 이르러서였다. 여권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총재의 아들 병역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2)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한겨레조차도 ‘군대의 의무는 신성한 것인데, 대권 후보라는 이의 아들이 부정하게 피했다’는 논조를 유지했다는 것만 봐도 징병제의 신성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또 한 번의 파장이 새천년의 경계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1999년의 ‘군 가산점 제도’ 문제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다. 군 가산점 제도와 관련해서는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지만 그때마다 남녀의 이분법적 구분은 견고했다. 그래서인지 1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군 가산점과 관련된 논의는 실질적인 진척 없이 무성한 말만 낳았다. 2000년 오태양 씨의 양심적 병역 거부는 징병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그 자체로 굉장한 파장을 낳았다. 여전히 징병제의 견고한 벽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돼 온 징병제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라는 점은 의미가 있었다. 놀랄 만한 것은 이런 선언이 ‘2000년이 돼서야’ 나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반독재 투쟁 관련 수감자가 적지 않았던 7-80년대의 감옥에 이미 종교적 이유로 병역 거부를 하고 수감 중이었던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실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병역 거부’라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징병제를 신성화하는 의식의 기저에는 ‘평화를 지키는 것은 힘’이라는 명제가 있다. 일례로 90년대까지도 한국에서 평화운동은 냉소적으로 인식됐다. “자기를 지킬 힘도 없으면서 무슨 평화야.” 같은 말이 상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평화’를 상상하는 데 있어서 반군사주의의 기치를 떠올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자기를 지킬 힘’에서 ‘자기’는 국가였다. 한국의 군사주의적 기조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되곤 하는 일본은 오히려 전후에 제국주의의 흔적들을 강박적으로 씻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동안 한국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 절대화된 것이다. 강한 군대와 강한 나라만이 우리를 지키는 힘이요,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국제 사회에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주사파들의 구호 “구국의 강철대오”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개개인은 어느 정도 반공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박정희의 자식이었다.

지금은 좀 나을까? 의문이다. 지식인들 그룹에서 포스트 박정희 시대를 말하고, 혹은 다시 그 너머를 이야기하지만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학과 영화 등 대중적 예술에서도 군사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종빈 감독은 장편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자>에 관한 인터뷰에서 “군사문화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라.”고 이야기했다. 군대를 다녀온 수많은 이들 가운데는 지식인들이 포함돼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일말의 의식 변화를 보였던 부분이 있다면, 작년에 있었던 ‘윤 일병 사건’에서의 대중의 반응일 것이다. ‘나약한 신세대’라는 식의 세대담론으로 치환되었던 이전까지의 군 폭력 사건과 달리, 집단이 개인에게 린치를 가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병역 의무가 신성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듯한 국민적 공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징병제’가 절대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제도 그 자체로 봐서도 상당한 손해다. 사실 징병제는 모든 시민이 그 대상이 된다는 특성이 있기에, 모든 시민은 징병제의 제도적 변화를 주도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징병제에 대한 논의는 ‘안보’라는 면에만 지나치게 담론의 무게가 쏠려 있어 사실상 어떤 문제의식도 발전할 수 없다. 이처럼 제도 변화가 답보 상태에서 수십 년을 머물러 있게 되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극도로 소수화시킨다. ‘희생과 애국’ 프레임을 넘어서지 못하고 끊임없이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판’을 뒤흔들 수 있는 상상력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 주체는 누구일 것인가? 징병제는 근대를 거치면서 징병제는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짝패와 같이 여겨졌다. 즉, ‘군사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을 때만이 시민권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고, 민주주의를 만드는 주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군대는 테크놀로지의 첨단, 교육의 장이었다. 전반적으로 대중의 교육도가 낮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후 복구과정에서 군에 소속된다는 것은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을 익히고, 군에서 배운 첨단의 방법들을 통해 사회를 발전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었다. 이 과정은 한국의 근대에 있어서도 완벽한 ‘남자들의 이야기’를 구축했다. 그렇기에 징병제란 남성 위주의 논의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판’을 흔들 수 있는 주체는 남성보다는 여성의 상상력에 더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물론 매우 지난한 일이다. 여성의 영향력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제한적이어서 일종의 ‘유리천장’으로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여성혐오가 광범위하게 발달돼 있고, 이것이 조직적으로까지 이루어진다는 데서 결코 쉽지 않은 문제제기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주의의 대립항으로서 반군사주의를 논의하는 물꼬를 트는 것은 한국 사회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문제다.

 

토론_ 국가주의와 군대의 관계, ‘성인식’으로서의 군대, 변화의 가능성

권인숙, 김찬호, 조한혜정

김찬호: 한국의 경우는 국가주의와 군대를 이야기하는 게 까다로운 문제다. 우선은 한국이 근대라는 것에 있어서 출발점이 좀 다르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근대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국권을 상실했다는 사실이 서구의 여느 국가와 상당히 다른 맥락을 형성했다. 국가를 잃었고,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를 상상하는 기초가 된 것이다. 3) 따라서 국가가 절대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군대는 이런 절대화된 국가의 도구로 이용됐다. 근대 이후의 군대는 테크놀로지의 본산이었다. 적을 이기는 것이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기술이 우선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실제로도 5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조직은 군대였다. 이런 합리성은 국가의 절대성을 뒷받침해줬다. 반일과 반공이라는 매우 큰 주제들 모두에서 군대는 유용하게 사용됐는데,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조차 독재와 맞서기 위한 도구로 군대에 다녀온 경험을 이용했다. 조직을 만들고 운용하고, 공권력과 맞서기 위한 전략은 다 군대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편법, 생존의 방식도 가져오는 것이다.

군대, 혹은 군사주의의 순기능이 전혀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여기에 권력의 측면이 개입되면서 부정적인 면들이 부각된다. 군대는 필연적으로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군대에서 배운 위계들을 사회에서 재생산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권력을 위압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사회 전반의 문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어떻게 제어하고 조정할 것인가가 주요한 쟁점이 돼야 한다. 징병제라는 제도 자체보다 이 제도의 변화가 정체된다는 부분, 타성이 생긴 부분을 조정해 나가고 대안을 고심하는 데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조한혜정: 병역의 여부가 시민권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것이 같은 국가 내에서 1등 시민과 2등 시민을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군대가 일종의 시민이 되는 성인식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찬호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편법과 생존의 방식을 배운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어른이 되는 방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 혹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군대를 안 가서 뭘 모른다’, ‘애 같다’는 식의 말들을 만들어 낸다. 먹고 살지 못할 적의 군대는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논리다.

한국이 이렇게 된 것에는 냉전이라는 전제가 있다. 일본의 경우 패전국이기 때문에 반전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자정을 해 나갔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게 됐다. 식민지로 살아왔기 때문에 강력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정서 전반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 있는 것이다. 힘 없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저항적 민족주의를 키웠고, 쿠데타와 그 이후에 관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화가 정당화됐다. 군사주의는 그 안에서 당위를 가진 것처럼 인식됐다.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그 안에 있다. 김홍중 선생도 지적하듯이 이런 방식의 생존주의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국가주의라는 게 질문할 수 없는 게 되고, 신성한 것이 돼 버렸다. 신성시된 것은 제도로 볼 수가 없다. 토론은 당연히 불가능해지는 것이고.

권인숙: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군대라는 게 진짜 평균적인 남자들 중에 안 맞는 사람이 많다. 복무 중에나 전역 이후에도 내면적 문제를 겪는 사람이 많다. ‘모두가 가야 한다’라는 식의 평등주의 흐름이 위험한 흐름인 것은 이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에 안보 이슈가 한동안 제기되지 않았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국가인데, 내부의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외부의 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효과적인 프레이밍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권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국면 전환에 이용해 왔던 ‘종북코드’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것이 사실은 충분히 종북주의를 누를 수 있었던 프레임이었는데 잘 끌고 가지는 못했다.

(군대와 국가주의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겠느냐는 문제는, 군인이 소모적 존재가 아니라 인권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여지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사실은 정권의 문제가 크다. 정권 차원에서 제도 변화가 일어나면 견고한 담론에 균열이 나고, 이에 따라 일깨워지는 것들이 있다. 군대의 문제는 분단의 상황과도 연결이 되는데, 분단의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 오면 또 굉장한 변화를 수반하게 되고, 이걸 어떻게 소화해 나가느냐와 마주하게 된다. 현재로서는 일천한 수준의 논의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뭐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남학생들을 생각하면 슬프다. 대만만 해도, 징병제이긴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가기 때문에 대학의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평등하고, 반서열적이고. 남녀 관계가 ‘그림’ 같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남학생들이 ‘무슨 대안적 경험을 했을까’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수준인 거다. 여전히 해병대 식의 군기 문화가 긍정적으로 수용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군대는 결국 내부용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이상이 아닌 거다.

 

=각주=

1) 육군에서 주로 쓰이는 구호.

2) 대권 구도가 본격화되던 6월경부터 이회창 총재의 아들 병역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이 총재 측에서 개설한 PC통신 게시판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동아일보, 1997.6.25. “컴퓨터통신에 뜬 유권자시각”). 야권에서는 이를 주요한 쟁점으로 삼아 집중적인 공세를 가했는데, 7월 하순경부터는 이것이 핵심적인 이슈가 되었다. 마침내 이회창 총재가 8월 3일 대국민담화를 발표하여 진화에 나서게 된다(경향신문, 1997.8.4. “국민·軍 장병에 송구”). 대선은 넉 달에 걸친 장기 레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선 직전 터진 총풍사건과 더불어 아들의 병역 문제가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면서 이회창 총재와 신한국당은 대선에서 패한다. 이 문제는 2002년 대선에서도 다시 한 번 이회창의 발목을 잡게 되는데, 최종적으로는 2005년 5월 9일 대법원에서 원고(한나라당) 승소 판결을 내리고 김대업과 오마이뉴스 등 피고들의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다(데일리안, 2005.5.13. “‘병풍(兵風)’ 사건 원심 판결 전문”).

3) 송호근은 이를 ‘군주-백성’의 봉건적 이원 체제가 ‘개인-사회-국가’라는 근대적 삼원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사회’를 어떻게 상상했느냐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개인과 사회, 국가가 동시에 호명되는 상황에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는 ‘형식적 국가’가 소멸돼 가는 자리에 ‘정신적 국가’를 설정해 넣게 되었다. 정신적 국가는 결국 현실의 국가로 돌아와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이후 개인과 사회의 모든 역량은 ‘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로 수렴된다. 서구에서의 근대는 개인과 사회가 국가에 대항해 투쟁하고 때로 협력하여 국가와 개인의 주권 관계를 조율해 나가는 것이었다면, 한반도에서의 근대는 그 출발부터 배타적 이해 관심과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대신 국가 건설의 소명을 부여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시민성(civicness)’의 결핍 상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실제의 국가가 건설된 뒤에도 ‘사회’가 ‘시민 사회적 성격’보다 ‘동원적 성격’에 가까워진 것이 이 때문이라고 송호근은 설명한다(송호근, 2013: 362-365)

참고문헌

송호근(2013). 『시민의 탄생 – 조선의 근대와 공론장의 지각 변동』. 서울: 민음사.

 

2015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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