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 1강 해방적 파국: 벤야민과 아렌트를 통해 보는 유럽 탈/근대화의 예언자들

발제_ 해방적 파국: 벤야민과 아렌트를 통해 보는 유럽 /근대화의 예언자들

김영옥

 

일단 제목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고 싶은데요. ‘벤야민은 근대의 어떤 철학적 사유를 대변한다기 보다 근대의 철학적 사유가 맞닥뜨리게 된 궁지 또는 어떠한 난처함을 대변하는 철학가다’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구요.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은 근대의 철학가지만 후기 근대 혹은 탈근대의 사상적 성찰들을 이미 맹아로 간직하고 있는 철학가다라고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예언자라는 단어가 좀 마음에 가시처럼 꽂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예언자냐, 너무 거창하다 내지는 이거 종교적인 개념인가?’ 식의 생각도 들 수 있고요. 또 최근에 나온 서동진 선생님의 『변증법의 낮잠』 서두에서는 이 예언이라는 말을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에서 언급하고 계시죠.

예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겠죠. 하나는 그야말로 통속적 관점에서 내일이나 모레쯤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는 혹은 다가오기를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행복에 대한 예언이지요. 그러니까 이 예언은 지금은 우리가 처해있는 이 시대적 상황의 역사적 조건을 질문하지 않은 채 그 조건 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꿈 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연결되는 미래적 소망으로서의 예언이지요. 그래서 이런 예언에게는 ‘그런 식의 행복추구는 말도 안 된다. 다 집어치워라!’ 라는 얘기가 나올 수 있겠죠.

그런데 벤야민이 살았던 시절에 벤야민과 더불어 유대교적 사상에 어느 정도 뿌리를 대고 있는 철학가들이 예언자라는 단어를 쓸 때는 그야말로 묵시록적인 지평에서 반드시 도래해야만 할 어떤 역사적 국면을 예언하고 그것의 실천을 이 지상에서 반드시 이룩하도록 해야 되지 않겠냐 라는 식의 관점을 대변하는 거지요.

그래서 벤야민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그 틀 또는 맥락으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벤야민은 유대교적 사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철학가다’예요. 벤야민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노예 그뎅켄(neue gedanken) 즉 새로운 사유라고 하는 일련의 흐름이 있었어요. 이 새로운 사유라고 하는 흐름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모두 다 유대인 출신들이에요

이때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게토에서 보수적인 사고방식으로 유대교적 습관이나 전통을 고수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니에요. 유대교적 사상을 왜 전유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서구 유럽 중심으로 계승되어 내려오던 어떤 철학적 사유의 전통이 있는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길래 혹은 어떤 지점으로 수렴되었길래 또 다른 어떤 가능성의 (이 가능성이라는 것은 인류애적 윤리라는 관점에서의 가능성인데) 출처로 유대교를 찾아내야 했을까? 이런 식의 질문이 더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유대교 출신 사상가들이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의 역사적 오류 또는 실패를 증명해서 새롭게 부상하고자 했었던 윤리적 전통이 새로운 사유 또는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거에요. 물론 이때 이들이 직면했었던 그 역사적 파국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파시즘의 등장이지요. 이성의 힘으로 지상에 유토피아를 설계하겠다던 근대의 알찬 포부가 (즉 종교의 맹목으로부터 인간됨을 해방시키자라고 했었던 그 열망이) 어떻게 사실은 인류의 해방이 아닌 인류의 파멸 혹은 한 종족의 절멸이라는 현상으로 가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길게 이어져 내려오는 어떤 철학적 사유의 한 전통에 대항해서 다른 식의 사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전통을 찾아 내려고 했었던 거죠. 그게 유대교입니다.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관습을 채택하려 했던 것도 아니고 유대교라는 실천 종교의 관습을 채택하려던 것도 아니었어요. 사유의 새로운 가능성 혹은 어떤 사유를 하면서 유럽이라는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 (인간이라고 하는 주체)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환경·역사적 흐름을 해석하려고 했던가를 질문하고 그것에 대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실천을 다시 한 번 잘 살펴본 거죠. 이게 과연 우리에게 다른 식의 관점, 대안을 줄 것인가를 본거죠. 그런 맥락에서 벤야민을 비롯해서 그 당시에 유대교적 사상을 전유한 사람들이 묵시록이라던가, 예언자라던가 메시아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거에요. 벤야민이 설정했었던 메시아주의, 혹은 메시아적 역사철학 혹은 과제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사회속에서 실제 존재했었던 종교적 관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입장,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죠. ‘메시아적’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편안하게 ‘혁명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집단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한국 사회도 그렇고 벤야민이 1900 년대 초반에 자신이 비판적·철학적 글쓰기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은 다 비정치적인, 혹은 정치적인 것 자체가 상투화 되어버린 상황이잖아요. 제가 언급했던 서동진 선생의 책도 통렬하게 초반에 비판적으로 해체하려고 하는 것이 이 비정치적 욕망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집단적 소망이라는 것을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추구하는데 이 행복 추구 혹은 행복 추구를 예언하는 상품 물신적 태도는 왜 문제인가? 그러면 반대급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소망, 행복 혹은 미래비전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돼요. 저는 개인적으로 행복권 추구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것이 왜 문제가 될까. 오히려 행복을 너무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고 일상에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비정치적이고 (사유와는 무관한) 속물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태도가 주지주의적인,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과 분리시키는 관점이 아닐까 하는 반성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어요.

행복을 얘기하는 것은 맞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행복 또는 소망이냐. 벤야민을 얘기하자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집단적 소망’이에요. 집단적 소망이야말로 개인이 사적 차원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행복에 대한 추구라는 방에 갇힐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비전같은 것이죠. 이 집단소망이란 것이 바로 개인의 도덕적 성취에 따라 구원이 보장된다고 하는 서구 기독교의 개인 구원사적 관점을 벗어나서 유대교가 줄 수 있는 집단적 행복추구인 거죠. 유대교는 기독교와 달리 “언제나 구원은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구원은 집단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펼쳤다고 해요. 벤야민을 비롯해 새로운 사유를 하려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인간들이 손을 맞잡고 무언가를 도모하는 이곳에서 혁명은 가능해야 한다였어요. 그래서 혁명이 추구하는 것은 집단적 행복에의 추구, 집단적 소망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제가 참고로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읽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복사하도록 한 페이퍼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벤야민이 꿈꾼 집단 소망이 가능한 세상의 모습은 어떤 건지 그리고 그것은 근대성, 혹은 자본주의, 미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지 하는 거예요. 제목과 관련해 돌아가 얘기하면, 벤야민은 근대라는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있다고 보았다는 거죠. 그러면 실패 앞에서 어떤 태도를 우리가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했고 실패했지만 근대가 출범하면서 실현시키고자 했던 본래의 꿈 그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다는 거고요. 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정치적 태도를 우리에게 요청하는가 라는 것이죠. 글이 너무 늦게 전달 되어서 다 읽지는 못하셨을 텐데 일단 벤야민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맑스와 견해를 함께하면서 상품생산이 정상성의 궤도에 오른 이후로 역사상 진보는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죠. 이것은 현재 한국 좌파에게도 중요한 화두가 아닐까 싶어요. 상품 생산, 그에 따른 후기근대적, 밀도로 진행되는 소비 같은 것들이 정상성과 일상성을 잠식하게 되면 우리는 진보란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진보를 말할 수 없다면, 파국만이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가능성이라면 왜 살아야 되지라는 질문이 생기는 거잖아요. 거기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약간 주술을 달면 주문은 우리에게 벤야민이 주는 것 같습니다.

벤야민이 궁극적으로 시민 혹은 시민적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에게 건네주는 과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런 거예요. 당신들 모두에게 메시아적 과제가 부여되어 있다. 메시아적 과제라는 것은 당신은 정치적 주체로 이 지상에 혁명을 이끌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기억하기에 벌써 7,8년 되었는데 독일에 유명한, 많은 영화인들이 존경했었던 감독이 맑스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긴 영화를 만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이 영화가 번역이 안 된 채 상영됐고요. 영화가 거의 8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심야상영을 보러 갔더니 딱 4명이 봤거든요. 어마어마하게 세기말에 생산되었던 혁명 관련 텍스트들을 새로 읽고 인터뷰하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에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이었어요. “왜 사람들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가?” 레볼루션이라는 단어가 이제 사어가 되어버렸잖아요. 그런데 이 감독이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래된 사상을 대변했었던 철학가들과 젊은이들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왜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혁명이란 단어를 최근에 들은 적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더 이상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거죠. 돌이켜보면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대학 때는 혁명과 개혁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썼던 거 같아요. 개혁이란 말을 쓸 때는 미안해하고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일단은 개혁을 하고 혁명이라는 관점은 계속 잘 긴장 속에 유지시키자 라고요. 이런 얘기를 협상 차원에서 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혁명이란 단어는 아예 쓰지 않고 개혁이라는 단어도 다른 것과의 대비 속에서 도드라지게 얘기되지 않아요.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수정해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이토록 깊이 물들면서 ‘근대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근대가 시작되면서 어떤 집단적 소망을 꿈꿨던 것인지 더 이상 묻지 않고 폐기처분 해버린 게 아닌가 묻게 됩니다. 근대성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그 흐름은 변화 가능한 것이고 각자가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주권적 주체, 역사적 주체 라는 단어를 많이 썼죠. 역사가 인간이 만드는 것이라면 역사의 진행과정에 우리가 집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 집단 소망, 집단 책임의 관점에서 연대의 이야기도 했고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서로 연관되는가 라는 질문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 역사철학이었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결과기 있었다고 종결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에 말걸기를 하면서 현재 안으로 개입해 드어오면서 현재를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고 다른 방식으로 거기에 대한 답을 찾게 하는 아주 성가시고 귀찮고 미완으로 남아있는, 현재의 어떤 결정으로만 완결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을 벤야민이 채택하는 것이죠.

이런 벤야민의 과거 이해, 과거 현재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벤야민식 답변은 벤야민이 파국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당시의 근대가 표방했던 근대의 역사관과 매우 다른 것이죠. 당시 사회가, 혹은 역사 철학이 표방했었던 관점은 현실은 나날이 진보한다는 거였잖아요.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3년 후가 더 잘 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식의 역사철학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상당히 기계적인 공간적 지표로 보는 관점에 의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시점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한자어로도 그렇고 영어나 독일어로도 그렇고 시점은 시간을 하나하나의 점의 연속으로 보는 거잖아요. 시간을 하나하나의 점들이 무한대로 연속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이 관점은 사실은 지상에서 혁명을 만드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 관점이기도 하죠. 혹은 너무나 안일하게 유토피아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던가. 이것을 벤야민이 너무나 의미 없는 선형적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식의 시간 이해를 가져오려고 한 거예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읽으신 분들은 벤야민의 유치한 수사학을 보고 웃으셨을지도 몰라요. 유물론적 역사관은 선형적 시간의 흐름에서 호랑이처럼 도약을 해서 뛰쳐나오는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대목이 있죠. 호랑이의 도약이라는 은유를 쓰는데 중요한 것은 호랑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런 식의 시간의 흐름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를 단절 시키고 포기해야 한다는 강조이죠. 끊임없이 역사를 한뼘 땅따먹기 식으로 보는 관점은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구조에서 말한 기술에 중심을 둔 전체주의적 사고이고, 무의미하고 공허한 자본의 축적, 축적 시스템 안에서 조금 더 나은 어떤 행복이라도 찾아보려고 하는 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는 거죠. 혁명의 원대한 비전은 다 잊어버린 채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판매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에 몰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를 맑스도 했는데 그런 식의 통속적 좌파주의 또는 사회주의의 한 버젼이 진화론적 사회주의라고 본거죠. 그런 식의 진화론을 멈추게 해야 한다. 다른 식의 시간, 공간에 대한 감각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호랑이의 도약이라고 한 거예요. 그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경험’이야기죠. 시간을 공간적 은유로 사용하는 것은 벤야민에서 처음 나타난 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거죠. 제논의 역설이 바로 그거잖아요. 시간을 시점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없어요. 화살을 쏘았을 때 화살이 지나가는 통로를 계속 시간으로 분할하는 거잖아요. 시점으로 분할 하다 보면 무한대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근대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그런 식의 시간 흐름을 결국 전제로 했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근대가 기술을 통해서 혹은 어떤 통치 전략을 통해서 혹은 다양한 제도들의 도입을 통해서 지상의 유토피아적 사회를 세우려고 했을 때 궁극적으로 도구적 이성, 합리주의가 우리를 이끈 곳은 파시즘이었다는 식의 인식인데요.

이런 식의 근대화 과정이 결국 인간의 삶에 가져온 다른 결과나 영향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경험의 빈곤’입니다. 우리가 시간 얘기를 했는데 시간을 시점들의 연속체로 볼 때 사라지는 것은 삶의 스토리라는 거예요. 반대급부로 말한다면 인간이 시간성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경험하는 것은 언제 가능한가. 자신의 인생 혹은 자신이 살면서 겪게 된 것을 경험의 스토리로 전달할 수 있을 때다 라고 보는 거죠. 경험은 무엇인가. 경험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발생시키는 효과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될 텐데요.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독일어로 보면 오랜 시간 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몸에 체화시킨 그래서 몸 안에 축적시킨 이야기들 이라고 볼 수 있어요. 독일어로 파렌(fahren) 이라는 동사가 차를 타고 어디로 이동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요 베파렌(verfahren)은 발로 어디를 돌아다닌다예요. 경험은 그래서 에어파렌(erfahren)이에요. 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러면서 자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경험인거죠.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사람이 누군가에게 들려줄 얘기도 많은 거예요. 그 얘기에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는 거죠. 지혜는 지식과 달라서 골방에서 책을 읽는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고 지혜야 말로 대대로 전수될 가치가 있는 것이라 본 거구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얘기를 전해줄 때 그 얘기가 희망을 약속할 수 있을 때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내가 세상을 많이 돌아다녔지만, 어딘가에 가 있었지만 거기서 내가 경험한 것이 너무나 암울하고 폭력적이고 슬프고 누군가에게 삶의 지혜라고 할만한 매뉴얼과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이야기를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라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게 되겠죠. 이게 벤야민이 보기에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 사회가 직면한 현실이라는 거예요. 전쟁을 갔다 온 사람, 인플레이션을 겪은 노동자들, 철거민이 된 사람, 극도의 빈곤을 경험한 계층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의 신체에 새겨진 경험들을 과연 남들에게 기꺼이 즐겁게, 집단적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전해주고 싶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거라 본 거죠. 그래서 이것을 경험의 빈곤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현시점에서도 여러 가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이야기의 전통이 왜 사라졌을까. 이것은 경험이 빈곤해진 것 혹은 경험될 수 있는 것의 맥락이 달라진 것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집단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 극도의 자본주의적 상품물신 형태로 졸아든 것과 상관 있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죠. 그럼 경험이 사라진 자리에 뭐가 남았을까. 일시적 체험들 혹은 전율, 충격 이런 것만 남았죠. 호러 영화들을 보며 짜릿하게 느끼는 30분 다양한 체험장소에 가서 길어봐야 한 시간에서 일주일, 인도 가서 겪은 두 달 정도로 경험을 대신하게 되는 현상을 직면하게 되죠. 그럼 체험한 것을 인류가 전승할 가치가 있는 지혜로 혹은 내가 사랑하는 너에게 전해줄 지혜가 될 수 있을까. 상품의 물신화 혹은 미학화, 모든 미술생산의 상품화, 이것이 만들어낸 획일적인 경험들, 이것이 충족 시켜줄 욕망. 이런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정치적 주체들로서 꿈꿨었던 메시아적 유토피아와 상응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근대화의 예언자들이라고 했는데 이 예언자들은 두 가지 국면을 본 것 같아요. 하나는 근대가 시작될 때 소위 새로 대두된 역사적 계급 주체로서 부르주아지가 약속하고 꿈꿨던 소망들은 몰락했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현재를 파편들 위에 파편들이 쌓이는 폐허의 장면으로 목도하는 게 한 가지 일 것이고요. 또 하나는 그렇다고 우리가 두 손 다 내려놓고 방관하고 포기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뭔가를 해야지 라고 하면서 무언가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새로운 메시아적 과제, 새로운 주체들의 연대, 혹은 일어섬 이것을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예언자적 역할이라고 볼 수 있겠죠.

제가 아렌트 얘기도 잠깐 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사실 아렌트나 벤야민이나 다 유대인으로서 유럽을 떠나야만 했었던 지식인들이잖아요. 유럽이 그런 식으로 파편 위에 파편 만을 쌓이게 하는 행보일 뿐인 역사적 행보를 목도한 사람들로서 그럼 어떤 식의 대안적 비전을 예언했는가 혹은 우리의 과제로 다짐했는가를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아렌트가 페미니즘 관점에서 볼 때 여러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아렌트를 본다면, 그건 그녀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정치적 주체의 과제 때문인 것 같아요. 광장과 사적 공간인 집을 분리한 것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의 원망을 받았잖아요. 정치적 행위가 이어지는 아고라 광장과 끊임없이 먹고 자는 목숨 연장만을 의미하는 사적 공간으로만 집이 분리된 것이냐며 이의를 제기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아렌트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했는데 그 점은 물론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갖고 있는 한계죠. 그러나 아렌트가 끝까지 정의의 관점으로 정치철학을 추구했던 점은 기억해야 하지 않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이 자공공 전체 프레임을 국민 시민 난민으로 삼았는데, 국민과 시민 사이 시민과 난민 사이를 어떻게 이해할까 질문하면 착잡하죠. 국민됨은 어떻게 가능한가? 국민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됐잖아요. 특히 국가가 자본과 결탁하면서 거의 국가 폭력의 독점자 노릇만 하거나 혹은 기능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집합 정도로밖에 기능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과연 우리가 국민이라는 위치 혹은 주체성을 사랑할 수 있는 가. 혹은 국민됨 이라는 위치성을 혁명이나 사회변혁의 관점에서 유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차라리 시민이라는 다른 식의 비전을 갖자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문제는 정의로서의 정치인 것 같아요. 아렌트가 끝까지 관철시키려 한 것은 정치는 정의를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부터 지켜내려는 투쟁이라는 것이죠. 아렌트가 보기에 사회라는 것은 정의로우냐 그렇지 않냐는 질문을 괄호 친 채 잘 살고 있느냐 혹은 수명이 얼마나 연장될 것인지 건강하냐는 것에 몰두했다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아렌트가 사회나 사회적인 것을 편협하게 봤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정의라는 관점을 얼마나 우선순위에 둘 것인가 인거죠. 아렌트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정의를 지키는 것이라 본 것이라면 그 관점이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있었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현실적 비판, 대안으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을 진지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신자유주의 체제 특히 신자유주의 금융화라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의(justice)를 임의대로 정의(define) 내리는 데 너무 익숙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정의에 대한 경각심, 자각을 새로 하려고 할 때 아렌트가 유용한 참조점이 되지 않냐는 생각을 하고요. 아렌트가 공공성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집단적 행복 혹은 대항 공공성 식의 개념에 여러 출구를 대어준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아렌트가 사적 공간 혹은 사회라는 것이 대의 즉 정의로운 정치적 공간의 대체물이 되는 것에 염려하면서 추구했었던 것이 행복이라도 사적 행복이 아니라 집단적 행복 혹은 공적 행복이다. 그리고 공적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공공성을 이해해야 한다. 공공성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저도 인용하는 아렌트의 문장 중에 “세상이라는 것(the world)은 사람과 사이에 있다”는 아렌트의 얘기를 환기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세상을 주어지는 사실과 제도의 총합으로 보지 않고(이런 관점이 통속적 사회 이해 잖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리가 투쟁해서 얻어내야 되는 대항적 공공성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한나 아렌트도 벤야민이 촉구했던 메시아적 과제의 실현을 나름대로 언급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YouTube “Miru Kim: Making art of New York’s urban ruins” by TED

미루의 작업에 주목하게 된 것은 미루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지하 탐험가 집단에 속하면서 폐허가 된 장소들을 찾아가고 그 과정을 사진으로 찍었기 때문이에요.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에서도 그렇고 폐허가 된 장소를 찾아가는 예술가 그룹이 있어요. 나름대로 유행이기도하고 멜랑콜리적 예술적 취향을 접목시키려고 하는 하나의 시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미루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분명해 진 것이 그녀의 일은 그런 일시적인 유행이나 취향 이상이다 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미루가 자기의 홈페이지에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쥐를 사랑하고 요리하기를 즐겨 하는 아티스트”라고 말을 해요. 이 “쥐를 사랑하고”라는 자기소개가 의미심장 한 것 같아요. 첫 째, 미루는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에 저항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근대를 이해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인본중심주의이고, 이 인본중심주의가 자연 정복 혹은 기술 만능주의 그리고 상품 소비에 자기 자신의 모든 행복을 다 거는 그런 상품 물신 등으로 요약 정리 될 수 있다면, 미루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미루의 쥐를 포함한 동물들과의 친화적 관계맺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근대 이전에 소위 전 근대식 말하자면 지금 일종의 향수적 취향으로 잘 못 오인될 수도 있는 그런 시기로의 마음 편한 어떤 퇴행이 아니라 근대를 추동시켰던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통렬한 단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동물과의 관계맺기 이구요. 그러면서 이 폐허에 주목하는 거죠. 미루가 그런 얘기를 해요. 얼마나 많은 그런 공간들이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다 폐허가 되고 있는가. 이 폐허라고 하는 것은 벤야민 철학에서는 일종의 은유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실재로도 특히 한국 같은 건설로 모든 역사적 진화를 책임지려고 하는 사회에서는 맨날 두 눈으로 지겹도록 보는 거죠. 건설했다가 파괴했다가 다시 재건설하고 재건축하면서 이것을 유사 어떤 욕망의 충족으로 우리에게 계속 강조하는데, 이런 관점에서도 폐허는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인 것 같아요. 이 폐허 속에 들어가서 건설중심의 근대화를 반성하고, 특히 지하의 폐허에 들어가서 도시 혹은 각 장소의 거주민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누가 제대로 된 거주민인가 누구와 누가 함께 어떤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의 방식인가 등의 질문들을 하는 거에요. 젊은 예술가들에게 미루 얘기를 하면, 많은 친구들이 미루는 좀 과잉 평가된 부분이 있고 sensation을 추구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미루가 누드로 폐허나 돼지 사육장 같은 곳에 들어가서 돼지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 것은 적극적인 독해가 필요한 작업인 것 같아요. 돼지 우리에 허락 받지 않고 몰래 잠입하는 거고 돼지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데 미루가 그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을 촬영한다 던가 그 우리 안에서 돼지들과 있는 것을 한 일주일 동안 계속 있는 것을 퍼포먼스로 진행한다 던가 하는 것이 갖는 어떤 반성적 국면도 환기하고 싶어요. 폐허가 안겨주는 역사 진보관에 대한 반성, 벤야민이 말한 시점으로 연결된 연속체를 역사의 진화로 보는 그런 관점에 대한 반성도 해주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5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