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정현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

* 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에 실렸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의 일부분입니다.

 

부친 살해에서 경쟁의 시대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 현재 우리 사회의 시대 정신의 가장 밑바탕, 다시 말해 ‘현재 속의 과거’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현재적인 세대, 지금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위 386과 그 언저리에 있는 ‘현세대’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경쟁적 나르시시즘’이다.

 

이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자면, 이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정체성이란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우며(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으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들이다. 오히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세대가 집착했던 것들이 현 시점에 한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전세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요청되어온 상상적 차원에서의 인정과 초자아적 아버지의 옹립, 경제의 재건 등을 통한 나(우리)의 확립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자유를 희생한 댓가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비의 세대가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부터 정체성의 확립을 추구했다면, 이제 그 자식 세대, 어느 정도는 상실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세대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세대가 자청했던 권위주의, 즉 결손된 상징화의 틈새를 뚫고 드러난 잔혹한 초자아적 아버지의 우상일 것이다.

 

아비의 우상을 파괴하고, (‘세습’이란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 계급적인 부조리를 척결하며 민주주의의 완성에 몰두한 이들은, 겉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전세대에 비해 급진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직적인 차원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이들이 치뤄야 할 댓가는 바로 수평적 차원의 부조리이다. 즉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우상 파괴, 초자아적 아버지를 타도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형제들을 기다리는 것은 ‘평등’과 ‘형제애fraternité’가 아닌 상상적 ‘경쟁rivalité’이다. 긴 시간 동안 준비되었던 서구의 근대화를 단번에 이식해버렸기 때문일까? 우리 사회는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묘사했던 부친살해 신화를 완벽하게 실행에 옮겼지만 미처 아버지의 육신을 나눠먹지 못한 채 경쟁의 장으로 내몰려버린 듯한 인상이다. 아버지의 빈 자리로 인해 금지된 대상들이 손에 닿는 곳에 위치하게 되었건만,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허용된 것이기에 경쟁은 더 없이 치열해졌다.

 

실제로 현세대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의 청산은 경쟁 사회로의 내몰림과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을 단순히 희소성의 원칙, 경제의 원칙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존의 문제에 있어 과거보다 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더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급진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들의 열망이 궁극적으로는, 특히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전세대 만큼이나, 혹은 더 가혹한 방식으로 보수성을 띨 수 밖에 없는지를, 다시 말해 어째서 수직적인 불평등에는 민감하지만, 수평적인 차원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중략)

 

증상으로서의 아이

물론 현세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경쟁 사회의 출현, 너무나 커져버린 욕망의 판돈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권위주의의 몰락과 연동된 경쟁 사회의 출현이 가족의 장과 접속해 만들어낸 일련의 현상들이다. 왜냐하면 가족은 새로운 세대의 양육과 교육의 가장 중요한 터전이란 점에서 또한 미래의 병리성이 싹트는 하나의 발원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목할 것은 자신의 아버지의 초자아적 권위에 도전했던 현세대가 끝내는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권위마저 반납하기 시작함으로써, 지난 세대까지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란 형태로나마 우리 사회를 지탱해왔던 부권중심의 가족 구조의 전도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성의 권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에서 핵심은 그러한 권위에 의해 설정된 구성원들 간의 ‘이타화異他化’이다. ‘이타화’란 가족의 구성원이 서로를 리비도를 투자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거세콤플렉스!), 바로 거기서부터 아이가 대상으로 남지 않고 주체로 숨 쉴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가령 지난 세기에 유행했던 어머니 상,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묵묵히 자식을 뒷바라지 하는 어머니 상은 사실은 어머니의 사랑이 상실된 것이라는 사실을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초점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그러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식의 시선이다. 과거의 우리에게 남아있는 애틋한 어머니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식의 환상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핵심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이다. 바로 여기에 부성의 권위가 가족들에게 설정한 ‘이타화’의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제 부권의 몰락과 더불어 구성원들의 대상적 근접성으로 인해,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촘촘해지고 더 강도 높은, 한 마디로 길들여지지 않은 애증의 망, 환상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정서적 망으로 얽혀버렸다. 소위 현재의 ‘핵가족’에서 문제는 더이상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더 근접해버린, 더없이 가족적인 가족이다. 원자들의 충돌이 엄청난 ‘핵’의 폭발력을 불러일으킬 만큼 너무나 근접해버린 가족.

 

물론 폭발 일보직전의 가족구조의 원인으로 아버지가 자신의 권위를 반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적한 까닭은 단순히 아버지가 아이들 사이에 위치하며 자신의 권위적인 모습을 철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아버지가 제 여자의 뱃속에서 나온 생명체에 제 성姓을 물려줌으로써 그를 누구의 자식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주는 준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자식을 통해 인정받으려 한다는 데 있다. 큰 타자의 부재로 인해 가족 속에서 두 성性을 이어주는 끈이 점점 더 가늘어졌기 때문일까? 탈근대적 상황의 도래와 함께 남녀 관계가 점점 더 자의적이 될 수록, 그 성관계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호출되는 것은 점점 더 이상화된 유아이다. 결국 이러한 이상화된 대상을 중심으로 가족의 새로운 리듬이 탄생하고 새로운 경제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가정 내의 잉여의 아이들(베이비붐)과 부모가 줄 수 있는 제한된 사랑 사이의 비대칭이 20세기에 두드러진 부권의 실추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 하여금 여전히 부권적 체제 속에 머물도록 만들었던 요인이었다면, 아이의 희소성으로 인한 산아촉진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이제 가장 숭고한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더이상 어머니가 아닌) 바로 유아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숭고한 대상이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이미 알아버렸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잃어버린 사랑을 환상 속에서 복원해내던 과거의 아이들과 달리, 이제 우리의 아이들은 더이상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그 사랑의 상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자식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 그것이 바로 어머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러한 유아의 물신화를 의미있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 수직적 권위주의의 청산에서 파급된 수평적인 상상적 경쟁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육아가 경쟁의 장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현세대가 더없이 판돈을 키워놓은 경쟁의 노름판에서 가장 큰 경쟁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겨루는 경쟁일 것이다. 결국 경쟁을 위한 최고의 판돈으로 내걸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우리의 아이들일텐데, 왜냐하면 아이는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만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가질 수 있는 무엇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세대는 아이를 학원에서 학원으로 내돌리고 가정의 모든 재력을 아이의 교육에 투자하는, 자신의 경주마가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는 절대 고삐를 놓지 않는 죽음의 레이스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육아 방식은 전세대의 육아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전세대에서 육아의 핵심이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주는 데 있었다면, 현재의 방식의 핵심은 바로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또한 ‘모든 이들’이 될 수 있는 한, 주는 것은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점에서 판돈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다. 그저 자신이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졌던, 오히려 자신의 결핍을 주는 것이 곧 사랑의 징표(또 부모에 대한 사랑을 부추기는 징표)가 될 수 있었던 전세대의 증여와 달리, 현세대의 증여는 줄 수 없음을 곧 죄악시하며 자신이 줄 수 없는 것도 주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있다. 결국 앞섬과 뒤쳐짐의 반복, 그 엇비슷한 레이스를 통해 불어난 것은 욕망의 판돈일 뿐, 현세대와 그들의 아이들은 유례없는 풍족함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빈곤함에 허덕일 수 밖에 없다.

 

현세대가 키워놓은 판돈의 규모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당연히 현세대가 아닌 그들의 아이들, 새로운 세대(‘신세대’)일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현세대의 경쟁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 경쟁인 반면, 신세대의 그것은 아직 갖지 못한 것, 즉 쟁취해야할 대상을 놓고 겨루는 경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구세대와 현세대의 나르시시즘적 문화에 의해 운명처럼 주어진 그들의 위치가 매우 역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들은 권위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생긴 새로운 가족 구조 속에서는 더 없이 소중한 대상, 특권적 대상이지만, 동일한 이유에서 사회 전반으로 확대된 배타적 경쟁 관계 속에서는 정반대로 평가절하된 대상의 자리를 떠맡아야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집안의 보물인 그들이 대문을 나서는 순간, (다른 이들에겐) 똥으로 전락하는 경험을 몸소 체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또한 고역스러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과대평가된 대상과 평가절하된 대상 사이를 왕래하는 고역스러운 체험으로부터, 그것을 주체화하는 신세대들의 고유한 포지션, 즉 ‘스펙specification’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보다 철저하게’ 대상화하면서도 타자를 전제하지 않는 냉소적 대상화, 그리고 그것과 연동된 어떤 ‘냉소적 나르시시즘’이 유래하는 것이 아닐까 가정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냉소적 나르시시즘’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것이 대두되기 시작한 여건으로 또 하나 언급해두고 싶은 사항은 바로 현세대에 의해 추진된 권위주의의 철폐가 시장 경제와 맞물리면서 만들어낸 ‘학교學校’의 몰락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내부와 외부, 개인과 집단의 경계를 조율하는 부권적 은유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그 기능을 늘 대신해왔던 것은 바로 ‘학교’였기 때문이다.

 

학교의 몰락에서 교양의 제국으로

우리는 지난 10년간 학교의 몰락을 목격했다. 몰락의 원인은 ‘주입식 교육의 병폐’나 ‘지식의 상품화’가 아니다. 역사상 지식이 상품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 어느 때도 공짜인 지식은 없었으며, 지식은 늘 값비싼 댓가를 치러야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도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고, 또 혼자 힘으로 깨우치기 위해서도 책값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런 대가를 치르는 만큼 올라가는 것은 지식의 가치이었다. 소 한 마리를 팔아야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던 구시대적 한탄은 당시 우리의 삶에서 소가 가졌던 위상과 가치를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지식의 가치로 인해 그 지식을 판매하는 곳인 학교는 늘 최고의 영예를 누려왔고, 지식을 파는 노동자였던 선생先生 역시 다른 노동자와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선생은 아무리 세상에 대해 무지한 자라 하더라도 제자들이 있는 한 영원한 선생이었고, 그런 한에서 특별한 존재, 부의 차이, 계급, 심지어는 지식의 차이조차도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선생의 영예로운 지위가 그가 우연찮게 꿰찬 상징적인 자리, 다시 말해 허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유효했던 것은, 전통적인 지식의 배분 구조가 배우는 자로 하여금 지식에 대한 욕망을 견지하도록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래의 지식에 비해선 보잘 것 없고 그 지식을 전수하는 자로서의 선생이 실상 가르칠 게 없더라도 지식이 그를 영예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가를 치르고서야 접근할 수 있는 그 지식이 배우는 자에게 앎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도록 인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지식과 그 지식의 판매인에게 드리워진 찬란한 광채는 비록 전이transfert에 의한 착각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도록 그 욕망을 지탱한다는 점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변증법 속에서 배움이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완성되는 것은 바로 최종적인 순간에 그 전이가 해소됨으로써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애초에 평등한 관계가 아니었던 지식 전수의 관계가 평등해질 수 있게 된다. 선생에 대한 애도deuil는 제자에게 지식의 욕망을 완성하며, 스스로 알고자 하는 것을 찾는 자로 위치하도록 만들며, 앞으로 선생만큼 혹은 선생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졸업’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과거지사일 뿐이다. 현세대에 의해 추진된 권위주의의 청산은 동일한 명목(대의)에서 학교를 상품의 시장으로 내몰았다. 아마도 상품의 시장이란 돈만 있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공간이란 점에서 그것이 지식의 균등한 분배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은 이러한 순진한 발상이 아니다. 지식이 늘 상품에 불과했던 것이 지식의 진실이라면, 그러한 진실이 지식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은폐되어야 했다. 문제는 이제 학교가 탈권위주의 혹은 시장의 논리라는 시대의 요청으로 인해 스스로가 그런 지식의 진실을 더 이상 감추지 않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영예를 스스로 반납하고 장사꾼이 스스로 장사꾼임을 공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이의 해소를 통해 최종적으로 획득되어야 할 수평적 지식 관계를 너무 성급하게, 인위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거기서 붕괴되는 것은 전통적으로 전이에 의해 지탱되어왔던 지식에 대한 욕망이다. 그리하여 결국 지식은 더 이상 욕망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변증법이 사라지고, 이제 선생에게 엿보이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얼굴이 아닌 어느 기업의 샐러리맨의 얼굴인 것이다.

 

물론 지식에 대한 욕망이 형성되지 않는 지식의 공간을 만들어낸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한편에 스스로 장사꾼임을 자인하기 시작한 지식상知識商이 있다면, 지식 속의 전이 기능을 실질적으로 마비시킨 것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인터넷 공간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지식의 새로운 배분구조이다. 시니피앙을 전달하는 데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온 인터넷의 발명 덕분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식, 다름 아닌 여분의 지식, 공짜의 지식이 탄생한 것이다. ‘책’이라는 지식의 물리적 공간을 증발시켜버리고 누구나 쉽게 공유할 수 있고 저장할 수 있는 무상 지식의 탄생은 그 동안 축적된 지식의 두께를 단번에 파괴해버린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지식의 희소성이 그마나 지식의 가치를 담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였다면, 이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이미 실현된 ‘지식의 파라다이스’는 지식의 인플레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는 주입식 교육이나 창의력 없는 교육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 주입당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더군다나 아이들이 현재 최고의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확실히 신세대들은 그 어떤 세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조기 교육의 열풍 때문이건 무상 지식의 전지구화 때문이건, 습득된 지식의 양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높아져가는 스펙의 평균치로 한국은 명실 공히 ‘교양의 제국’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주입된 내용이 전이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 않으면서 지식에 대한 욕망을 작동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주입식 교육보다 ‘더 나쁜’ 현재의 교육이다.

 

산발적 초자아와 배설적 정체성

학교의 몰락과 스펙 사회로의 전환은 현세대에 의해 준비된 경쟁중심 사회에서 신세대가 당면한 ‘처지(조건)’일 뿐이며, 그런 점에서 그것만으로는 신세대의 정체성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문제는 이러한 처지에 대한 응답으로 신세대가 짊어지게 될 주체화의 독특한 방식, 아마도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급진적이지만 정치적 차원에서는 보수적이라는 역설이 만들어지는 독특한 방식이다. 우리는 앞서 그것을 ‘냉소적 나르시시즘’이라 칭했는데, 이 안에는 하나로 축소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포함된다.

 

물론 집안의 찬란한 남근이 집 밖으로 나가면 똥으로 변질되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신세대가 그것을 견디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선, 앞서 언급한 대로 스스로를 보다 철저하게 ‘계산가능한’ 대상들로 환산하는 것이 그 중 하나다. 즉 자신을 철저히 ‘스펙형’ 인간으로 길들이는 것. 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요구되는 대상’이 되고자 한 것일까? ‘스펙’은 과거의 학벌이라는 개념과는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다. 예전의 학벌은 소유의 대상, 쟁취의 대상 이상이 아니었고, 그것은 일단 쟁취하면, 나의 다양한 속성들 중의 하나로 내 밑에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속성의 주체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펙’이란 주체가 곧 재화의 소유자가 아니라 재화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들은 마치 자신의 피부에 토템의 문양을 새겨 제 존재를 부족의 한 가운데 기입하고자 했던 저 원시 부족처럼, 자신의 육체에 상표商標를 기입하고 스스로 저 상품들 한 가운데 서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분명 학벌 사회에서 스펙 사회로의 변환에는 어떤 존재론적인 전환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스펙형 인간들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대상화하지만, “나는 타자를 위한 대상입니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구세대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달리, 자신이 봉사하는 타자의 일관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이것이 또한 학벌 사회와 스펙 사회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즉 스펙은 자신이 요구되는 대상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함축하지만, 그의 영혼은 자신의 구매자인 기업이나 조국을 향해 있지 않다. 팔리기 위해 기꺼이 준비된 상품이 된 인간은 더 이상 기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의없는 어떤 냉소적 대상화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 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 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 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 집밖으로 나오면서 발생한 추락을 잊기 위해 아이들은 무리를 짓는다. 무리는 늘 배척해야 할 하나의 여분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따돌리기’이다. ‘무리짓기’와 ‘따돌리기’는 하나의 짝패를 이룬다. 이것이 몰락한 학교에서 더이상 아이들을 관계짓지 못하는 권위주의를 대신해 그들을 무리짓게 만드는 힘이다.

 

물론 공동체의 구성이 늘 어떤 희생양(마녀, 광인, 유대인…)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리가 만들어지는 방식, 그리고 그와 연동된 ‘따돌리기’의 방식이다. 이러한 (새로운 새대에게서 나타나는) 무리의 특징은 그것이 정체성으로 고착된 증상들의 연대lien라는 데 있다. 즉 이들의 무리짓기는 어떤 공동의 목표라든가 이념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통적인 방식의 집단 구성, 소위 큰 타자를 전제하는 집단 구성이 아니다. 이들의 무리짓기는 각 구성요소의 병리성들의 집합이며, 이런 점에서 이것의 이면인 따돌리기는 집단적인 증상이 아니다. 집단적 증상이 타자와의 연대 자체로부터 오는, 다시 말해 타자와의 연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병리적 증상이라면, 신인류의 ‘따돌리기’는 어떤 이타적 연대를 전제하지 않는 개별자들의 증상들의 공유일 뿐이다. ‘따돌리기’란 오로지 각자의 병리성을 견디기 위해 한 대상을 향해 침을 뱉는 것이고, ‘무리’는 그러한 행위들의 우발적인 교차로서 주어질 뿐이다 (‘악풀의 연대’) 따라서 이들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면서도 철저하게 집단적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의 구성방식, 특히 전통적인 초자아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어떤 여파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위 산발적 초자아의 출현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집단이 내면화된 초자아와 외부의 지도자 간의 어떤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지탱되었다면, 새로운 ‘무리짓기’에서는 상징적 권위주의와 학교의 몰락으로 인해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전혀 다른 상황이란 초자아의 부재가 아니다 ― 초자아는 어떤 매개체에 의해 완화될 순 있지만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바로 산발적 초자아, 파편화된 초자아들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에 의해 결착되지 않아 파편적이고 가시적이지 않지만, 상징화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더 강박적이고 중독적이다. 상징적인 은유의 부재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견고한 경계선이 깨지면서 초자아는 표층화되고, 오로지 자신의 병리성의 배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신인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는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듯 보인다. 이들에게는 전세대에서 볼 수 있는 고리타분한 집단적인 죄의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들에겐 그들의 일관성을 보증해줄 타자에 대한 믿음이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믿음이 부재한다는 것은 또한 진보에 대한 믿음도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마도 이것이 남근과 똥 사이를 왕복하는 그들이 감성적인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수화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후략)

 

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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