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후 칼럼 <지속가능성의 지속가능성>

 

공생을 위한 나침반

 

오늘날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화두다. 이를 증명하듯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논문, 정책, 기사는 물론이고, 이와 연관해 개최된 국제회의 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구글에 한글로 지속가능성을 입력하면 5억 개, 영문으로 Sustainability를 입력하면 1억 개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 정보, 기사가 검색되고, 이 중에서 전문적 학술 자료만도 백팔십만 개에 달한다. 이쯤 되면 ‘지속가능성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조된 관심의 정도와 별개로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지속가능성이 전 세계의 화두로 등장한 이유는 인류가 영위해온 삶의 방식이 미래의 생존을 위해 적절하지 못하다는 실질적 지표와 증거가 속속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과다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몰고 온 지구온난화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결국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은 지속가능하지 못함에 대한 역설이자,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절박함의 표출이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생태학에서 출발했다. 생태학자들은 화석연료와 기술발전에 기반한 도시가 환경파괴에 미치는 치명적 영향을 경고하며, 현대문명과 생명체 사이에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발전을 추구하되 과거와는 달리 환경을 보호하며 공존을 모색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공감대 속에 1992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환경개발회의를 통해 실천계획 성격의 ‘의제21(Agenda 21)’을 채택했고, 이후 지속가능한 발전이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많은 도시들이 추구하는 공통의 목표로 떠올랐다.

 

주목할 점은 지속가능성의 원리가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지속가능성이 마구잡이 개발과 무분별한 에너지 소비로부터 지구를 보호하자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지만 ‘경제적, 사회적 맥락의 지속가능성’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즉, 사회 구조를 친환경적으로 재편함과 동시에 인종, 민족, 지역, 계층 간에 축적된 다양한 불균형, 불평등, 갈등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2005년에 개최된 ‘사회개발 세계정상회의’에서 환경∙사회∙경제의 세 개 분야가 상호보완적 맥락에서 21세기가 추구하는 지속가능성을 지탱하는 축임을 천명한 이유다. 따라서 지속가능성을 여전히 기술적·공학적 측면으로 한정해 접근한다면 이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지속가능성은 모든 분야에서 각기 다른 가치의 ‘공존’을 통해 ‘공생’을 실현하기 위한 나침반이라 정의할 수 있다.

 

 

지속가능의 길목에서

 

에드워드 글레이저가 칭송했듯 도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부를 만하다. 물론 특정한 한두 명의 발명가가 없는 독특한 발명품이다. 아이러니는 도시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양산한다. 만약 도시가 없었다면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어쨌든 현대도시가 낳은 문제들은 누구나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드러났는데, 핵심은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라는 현실이다. 즉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목표는 명확해졌으나 지속가능한 도시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이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바이를 중심으로 중동의 도시들이 새로운 도시개발의 패러다임을 선도하는 것처럼 집중 조명을 받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개발도상국들이 두바이를 배우자고 목청을 높였고, 신화 혹은 기적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었다. 심지어 두바이와 지속가능성을 관련 지어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쯤 되면 코미디라 할 만하다. 두바이 개발에는 소위 ‘한 탕’을 쫓는 투자자들이 넘칠 뿐, 시민을 위한 도시 환경과 공간을 창조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두바이가 신기루였음이 드러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전문가들은 두바이의 실패 원인을 예외적인 국제 경제 상황의 악화로 에둘러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한 도시의 지속가능성은 단기간에 개발 붐을 부추겨 ‘대박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내외부적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경제적 체질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두바이가 선택한 대박가능성의 이면에는 늘 ‘쪽박가능성’이 존재하므로 결코 지속가능할 수 없다. 경제 불황이 닥치지 않았을지라도 두바이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가능성을 뒷전에 두고 태생적으로 지속가능할 수 없는 도시인 두바이를 따르려던 도시들의 지속가능성이야 말해 무엇 하겠나.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미 유치가 확정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과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필두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굵직굵직한 국제 스포츠 행사들이 줄을 섰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같은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이 자체를 딱히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지난 백여 년 동안 각종 스포츠 행사를 준비하며 빚을 내서 그럴듯한 경기장과 기반시설을 통째로 새롭게 건설한 사례가 적지 않다. 어마어마한 빚을 떠안았지만 세계로부터 주목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에 지도자와 시민들은 위안을 삼았다. 또한 국제적인 인지도 상승을 돈으로 환산하면 몇 천억, 몇 조에 버금간다는 장밋빛 통계들이 빚더미에 올라 앉은 불안감을 다소나마 덜어주곤 했다.

 

과연 오늘날에도 비슷한 논리가 통할까? 고작 몇 주 동안 진행되는 단 몇 차례의 경기를 거행하기 위해 산을 뭉개고, 녹지를 갈아엎어 만든 최첨단 경기장과 시설은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어느 측면에서도 지속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지역 간 이기주의가 발동하고, 시민들은 땅 값의 오르내림에 혈안이 되는가 하면, 급기야 편이 갈려 싸우기까지 한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마땅한 쓰임새를 찾지 못해 유지비만 탕진하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고, 곧이어 재개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설마 하겠지만 전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엄연한 현실이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존 시설과 자원을 최대한 (재)활용하고, 끝난 후에 어떻게 해당 시설과 공간이 지역 사회, 경제,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 들 수 있을 지가 보다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바로 지속가능성이고, 가장 최근에 거행된 2012년 런던올림픽이 이를 혁신적으로 수용해 스포츠 행사의 새로운 ‘유산’을 탄생시켰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하며 진부한 관행을 반복하는 도시들이 있다. 즉, 지속가능한 방식에 대한 연구와 접목을 뒤로 한 채 지속가능하지 않은 손쉬운 방식을 따른다. 오로지 수용 인원, 관광객 수 그리고 쓴 돈과 남은 돈을 비교해 행사의 성패를 평가하려는 아둔한 이들에게 지속가능성이라는 어마어마한 무형의 이윤과 미래의 가치가 보일 리 만무하다.

 

스케일을 줄여 도시를 들여다 보면 지속가능에 역행하는 사례는 더욱 다양하다. 새로운 성장 산업이라는 미명 하에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성형관광을 내세우는 천박함, 외국 관광객이 늘어난다고 호텔을 급조하고 외국인 거리를 조성하려는 경박함,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이 떴다고 우리도 구겐하임 박물관을 건립하자는 경솔함, 전통을 되살리자고 무턱대고 건물에 기와를 얹는 유치함, 사회적 합의나 절차를 무시한 채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취향에 따라 기념비를 마구 세우는 이기심까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도시를 병들게 하는 즉흥적 발상이다.

앞서 강조한 바와 같이 지속가능성의 범위는 다양해지는 추세다. 이는 곧 지속가능한 도시를 창조하기 위하여 더 많은 판단과 직면한다는 의미다. 눈과 귀를 열어 지속가능성의 본질과 흐름을 파악하고, 지속가능의 길목에서 주저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방향을 선택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예외 없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향의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지속가능한 영토를 향하여

 

분명히 희망의 불씨도 피어오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 도시에서 화두로 등장한 키워드를 세 개만 나열해보자. 공공디자인, 마을 만들기, 원도심 재생 정도라면 큰 이견이 없을 듯싶다. 수도권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바람을 일으킨 혹은 여전히 진행형인 키워드임에 틀림없다.

 

이 세 개의 키워드가 등장한 배경과 지향하는 바는 각기 다르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지속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공공디자인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리고 즐기는 공간과 시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 마을 만들기는 공동체의 의미와 가치를 심으려는 노력, 원도심 재생은 낙후된 지역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활력을 부여해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가꾸고, 나누고, 참여하여 특정 집단과 계층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 다름 아닌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시도다. 얼마나 희망적인 움직임인가.

 

물론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몇 해 전에 광풍을 일으켰던 공공디자인은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치장하는 환경미화사업 수준으로 전락한 쓰라린 경험을 했고, 마을 만들기와 원도심 재생은 야심 찬 구호와는 다르게 재개발의 변형된 형식으로 졸속 진행된 사례가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에서 본질을 정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비판과 우려의 핵심은 공공디자인, 마을 만들기, 원도심 재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사업들이 지속가능한 방식의 토대 위에서 지속가능을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못했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일정 구역의 멀쩡한 보도블록을 새것으로 전부 교체하고 명물 거리라 자화자찬하는 것, 지속가능한 거리일 리 만무하다. 낡고 부서진 보도블록만을 교체해 안전하고 쾌적한 거리를 유지하고, 이 거리가 십 년, 백 년 동안 유지되어 시민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명물거리로 불리는 것, 이것이 지속가능한 거리다. 마을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마을 회관을 짓고, 새 길을 놓고, 벤치를 설치한들 마을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지 그럴듯한 마을 분위기를 연출할 따름이다. 마을 회관에 남녀노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고, 길은 가족, 친구, 연인이 자연스럽게 걸을 만해야 하며, 벤치는 주민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꽃을 피울 수 있는 환경을 동시에 조성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사업이 끝난 후에도 스스로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잃지 않는다.

 

핵심은 무엇인가? 지속가능성이 공공디자인, 마을 만들기, 원도심 재생 등 오늘날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위의 기초에 굳건히 뿌리내려야 한다. 다시 말해 지속가능성은 공허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도시의 변화를 이끄는 실질적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련의 행위에 지속가능성의 끈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시대를 이끈 크고 작은 아젠다가 존재해왔다. 훗날 역사가 21세기를 지속가능성의 시대로 정의할지 지금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지속가능성은 특정한 시대를 넘어 인류가 영원히 추구할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성은 ‘미래’와 ‘나눔’을 바탕으로 새로운 영토를 구축하는 창조적이고 지혜로운 작업이며, 새롭게 탄생한 지속가능한 영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이제 모두가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고 실천할 방법을 찾아 나서자.

 

2013년 5월 건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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