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칼럼 <2013년, 지속가능성 혁명을 이야기하자>

2013년, 지속가능성 혁명을 이야기하자

조한혜정

 

“마지막 강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죽어나가고 마지막 나무가 잘려질 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 시점이다. 화석연료와 공업화, 과학기술과 국민국가, 그리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건 근대 자본주의는 이제 자원의 한계, 환경파괴, 핵의 재앙이라는 파국을 맞고 있다.

 

금융자본주의적 투기와 도박이 일상화된 상황은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근대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부를 축적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오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사는 돈과 권력에 중독된 공고한 세력과 ‘부자’ 되기를 열렬히 원하는 대중이 만나면 광기의 파시즘을 낳는다는 사실을 일찍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비슷한 양상이 지금 ‘경제대국’들이 모인 동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50년을, 아니, 100년의 시간, 천년 그리고 5만년의 시간을 거치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간 인류는 한 문명이 쇠하면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면서 지혜롭게 지구상에서 살아왔다. ‘근대문명’의 몰락이 역력해지고 있는 지금은 새 문명을 일으켜야 할 때이다. 한국이라는 국가에 속하는 지구주민인 우리는 몰려오는 재난과 재앙의 징후를 직시하고 비상을 위한 방법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교재들은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더 이상 시장이 질주하는 사회가 아닌 공유 경제를 만드는 일, 공생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자에 대한 거부감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한때 통찰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존경을 받았지만 모두가 신이 된 ‘탈근대적’ 상황에서 그들의 당위론은 식상하고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표방가치와 실행가치의 표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이번 대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투표율 50%를 넘기지 못하는 일본 주민들은 한국을 부러워하지만 50대 투표율이 89.9%이고 유권자의 45%가 50대 이상이라는 이번 선거는 수상쩍어 보이지 않는가?

 

20대 대학생들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전공인 나는 20대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는 50대 부모들이 누구를 위해 투표를 했는지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입시노동’을 열심히 하였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마땅한 사회적 위치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자녀세대의 미래를 걱정하며 소중한 한 표를 던졌을까? 혹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것들”을 위해 투표를 한 것은 아닐까?

 

수치상으로는 ‘선진국’이 된 지 오래지만 한국의 장년들은 여전히 선진-첨단을 외치며 달리면서 자녀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닦달해왔다. 이 성과적 주체들이 멈추지 않고 도달한 곳이 바로 아파트공화국과 입시공화국, 그리고 보험공화국이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공화국을 해체하면서 문명 전환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새 문명을 만들어갈 주체는 누구일까? 그 일은 살아갈 날이 창창한 청년들의 몫이다. 그런데 ‘입시노동’ 외에 제대로 해본 것이 없는 대학생들은 난감해한다. 일부는 자신들이 치른 입시전쟁이 부모를 위한 대리전이었을지라도 이미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기 때문에 스펙 쌓기에 몰두하겠다고 한다. 한눈을 팔기로 한 청년들도 적지 않지만, 망가져가는 세상일에는 말려들고 싶지 않거나 문제 해결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생각에 주춤거리고 있다. 마냥 착한 얼굴로 예의바르게 지내는 것이 최상의 생존 비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혼자만의 재밋거리를 개발해서 오타쿠로 지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무시와 모욕을 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발언은 특별한 자들의 몫이다. 이웃에서 핵발전소 재난이 일어나도 계속 잠잠한 상황을 우려하며 연말에 교수 1052명이 탈핵 서명을 했지만 학생들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두고 나는 그들을 부모의 귀여움이나 받으며 편하게 지낼 생각만 하는 ‘강아지’라거나 모든 것을 잔머리를 굴리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초합리적 바보’라고 놀리곤 한다.

 

사회와 단절하고 스스로를 단속하며 사는 이런 특별한 청년세대의 출현이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 피로와 과로, 그리고 ‘멘붕’을 토로하는 이들, 바닥을 친 걸까? 슬슬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수업에서 시키는 일, 목공으로 책상을 만들고 캠퍼스 안에서 친구들과 텃밭도 가꾸고 폐자전거를 해체해서 새 자전거를 만드는 작업을 기꺼이 하기 시작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가슴’이 있었기에 지속가능했다. 보이지 않는 가슴, 곧 돌봄 영역이 파탄나면 더 이상 사회는 지속할 수 없다. 서로 말을 나누지 않는 ‘무언가족’,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무연사회’, 연이 끊어져 작은 일로도 쉽게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하게 만드는 사회를 우리는 지금 만나고 있다.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힘을 주는 관계, 최소한의 바람막이와 비빌 언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내 수업이 불안감만 가중시킨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학생들에게 나는 마사키 선생의 ‘나비문명’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뭇잎을 다 뜯어 먹어버리면 나무가 말라서 죽고 애벌레들도 다 죽게 될 테지만, 고치를 열심히 쳐 나비가 되면 나무도 살고 애벌레도 산다. 그러니 고치를 열심히 치며 동굴에서 나올 용기를 가지라고 권하면서 내가 해주는 우화가 있다.

 

“숲이 타고 있었습니다. 숲속 동물들은 앞을 다투며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크리킨디란 새는 주둥이로 물고 온 한 방울의 물로 불을 끄느라 분주했습니다. 도망가던 동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저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크리킨디는 대답했습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

 

새 문명을 향한 혁명은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돌봄이 있는 식탁, 난감함을 공유하는 원탁회의, 상부상조하는 이웃들이 모이는 우정과 환대의 자리들일 것이다. 과도한 기술파괴 시대에 적정기술을 발전시키는 일,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풀어낼 새 대학을 만드는 일, 인터넷 시대의 세계지도를 새로 그리는 일, 이런 일들은 모두 돌보는 마음을 가진 청년들과 그들을 진정 사랑하는 부모들의 자원이 연결된 때 가능해질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그간의 고도 압축적 방식이 아니라 압축을 푸는 느슨하고 느린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헛바퀴를 돌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제주 바닷가, 공유의 원리로 운영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고치를 치고 있는 청년들을 만난다. ‘나’이면서 내가 아닌 ‘우리’들의 창의적 공유지대가 많아질 때 새로운 문명과 만날 수 있다. ‘우리’를 만나기 위해 고치를 치고 함께 나비가 되어 비상할 꿈을 꾸는 새해 아침이다.

 

 

2013년 1월 1일 경향신문 특별기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