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나르시시즘의 시대 : 경쟁과 냉소 사이’ 기록입니다

12월 5일 정신분석학 박사이며 정신분석클리닉 혜윰을 운영하고 있는 맹정현 선생님의 강의
<나르시시즘의 시대 : 경쟁과 냉소 사이>가 있었습니다.
문화연대 공동대표인 임정희 선생님과 연세대 정승화 선생님도 자리를 함께 해주어
더 깊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었습니다.

 

이날 맹정현 선생님은 45분간의 명료한 강의를 통해
우리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나르시시즘이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요즘의 부모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경쟁적 나르시시즘이

요즘의 자녀 세대들의 고유한 냉소적 나르시시즘을 만들어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세계 속 ‘아버지의 몰락’를 목도할 수 밖에 없었던 전쟁 세대가
그 반작용으로 상징적 아버지, 즉 권위주의를 요청하게 되었고,
그 다음 세대(요즘 부모세대)는 그 반발로 권위주의를 끌어내립니다.

부모세대에서 이루어진 권위의 몰락이 경쟁의 구도를 만들어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판돈’으로 둔채 경쟁을 벌입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던 정체성을,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로부터 확보하고자 합니다.
즉 ‘누가 더 좋은 아이를 만들어내느냐’가 부모들의 과제가 됩니다.
아이들은 물신화되고 신성시되는 대상이 되며 육아는 경쟁의 장이 됩니다.
자기가 대상화된 경쟁 속에서 자라난 자녀 세대들은 냉소적 나르시시즘을 구축합니다.

 

맹정현 선생님은 냉소적 나르시시즘이란 믿을 만한 타자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사회 도처에 일어나는 상징적인 아버지(권위)의 현실적인 몰락, 그리고 대상으로서의 과대평가 속에서
아이들은 믿을 만한 타자를 갖지 못하고 냉소를 익히며
자기를 팔릴만한 상품으로 만드는, 즉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자기계발에 열중합니다.
그리고 산발적인 초자아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지요.

 

맹정현 선생님의 이 가설은
그날 아카데미에 있었던 많은 ‘요즘 자녀’ 세대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질문과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고, 대체로 2시간 정도면 마무리되던 1부 순서는 3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수강생들이 모여 토론하는 2부에서도 열띤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날의 강의와 질의 응답을 자세히 읽고 싶은 분은
아래 첨부된 강의록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

 

 

 

 

 

 

 

 

 

 

 

 

 

 

 

 

 

 

 

 

 

 

 

 

 

 

 

 

 

 

 

 

 

 

 

 

 

 

 

 

 

 

 

 

 

 

 

 

 

 

 

 

 

 

 

 

 

 

 

 

 

 

 

 

 

 

 

 

 

 

 

 

 

 

 

** 1부 **

 

조한 : 지난 주에는 무연사회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그동안 자공공 아카데미에서는 사회적인 부분에 대해 계속 논의를 해왔어요.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논의라고 생각해서, 오늘은 맹정현 선생님의 정신분석학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였습니다.라는 책도 쓰셔서 보신 분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임상도 하고 오셨고 요즘 인기가 많으신 분입니다. 임정희 선생님도, 정승화 선생님도 관심 많으신 분들이라서 모셨고, 같이 이야기 들어보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1. 말문트기 – 맹정현

 

맹정현 : 안녕하세요. 사실 제가 이런 분위기를 기대하고 온 건 아니었거든요. 와서 보니 엠티 분위기도 나고 흥겹네요. 그 흥겨움에 제 이야기가 어울릴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오늘 강연의 제목은 ‘나르시시즘의 시대 : 냉소와 경쟁 사이’입니다. ‘나르시시즘의 시대’라고 했을 때 이 표현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을 나르시시즘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지요.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는 많은 사회학자분들이나 문화비평가분들이 이미 하신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오셨으면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진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조금 비틀어서 하고자 합니다.

 

보통 나르시시즘이라면 이 시대가 갖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말하기 위해 그 표현을 쓰는데, 제 맥락은 조금 달라요. 일단 나르시시즘이 개인주의와 다른 것이지요. 나르시시즘이 개인주의로 귀결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개인주의라고 해서 다 나르시시즘인 것도 아니지요. 더 나아가 우리는 개인주의의 반대로 이타주의를 이야기하는데, 이타주의 역시 나르시시즘과 크게 모순되지 않을 수 있어요. 실제로 정신분석에서는 이타주의의 출발점이 나르시시즘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고 있지요. 가령 타자의 몸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을 때,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 이타주의의 출발점이 아니겠냐는 거죠.

 

나르시시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사실 없어요. 대상 리비도 투자라고 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 나르시시즘과 그렇게 모순되는 건 아니죠. 가령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고 할 때면 그 사람에게서 사랑 받기를 원해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를 점점 더 사랑해 달라, 그렇다면 대상에 대한 사랑과 나르시시즘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겠죠. 심지어 자신을 버린다고 할 때조차도 나르시시즘이 없으면 안 돼요. 최소한의 나르시시즘이 있을 때여야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조건이 되지요. 누구에게나 나르시시즘은 필요하고 어떤 집단이든 나르시시즘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나르시시즘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일 수 있다는 거죠. 개인의 정체성 뿐 아니라 한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거죠. 나르시시즘적이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은 없다는 이야기인데요. 우리 시대가 나르시시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나르시시즘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시대에 나르시시즘이 구축되는 방식이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부분이 오늘 이야기할 부분인 것 같아요.

 

저의 출발점이 무엇이냐면, 각각의 시대는, 각각의 세대는 그 자신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나르시시즘이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르시시즘이 구성되는 방식으로 인해 그 나르시시즘이 더 돋보이거나 더 강조되는 문화가 있을 수 있겠지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르시시즘의 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시대의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일텐데요. 이를 위해서 제가 제안하는 용어는 두 개입니다. 하나는 ‘경쟁적 나르시시즘’과 또 다른 하나는 ‘냉소적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나르시시즘의 시대 : 경쟁과 냉소 사이’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경쟁적 나르시시즘’란 나르시시즘이 경쟁적인 방식으로 구축된다는 의미이고 ‘냉소적 나르시시즘’란 나르시시즘이 냉소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단어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오늘의 핵심이 될 것 같아요. 가 어떻게 일단 제 용어를 가지고 무엇을 분석할지를 먼저 명확히 규정해야 할텐데요. 우리 시대의 무엇을 분석할 것인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분석대상이 무엇이냐면, 간단히 말씀 드려서, 요즘 아이들과 요즘 부모들이에요. 요즘 부모란, 현재 부모 노릇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세대들입니다. 그들의 자식들이 또 다른 자식들을 낳은 경우가 아니라, 절대적인 자식으로 남아있는 자식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것이 요즘 부모라고 했을 때의 의미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무엇이냐면, 누군가의 자식이지만 아직 세포분열을 일으키지 않아 절대적인 자식으로 남아있는 세대들입니다. 어린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이삼십 대 청년들까지를 의미할 수 있겠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세대고 하나는 타자에게 종속되어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세대인 것입니다. 두 세대를 나르시시즘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두 개를 구분한 것은 소위 세대가 구성되는 방식을 나르시시즘을 구성되는 방식과 연관시켜서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현재의 사회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요. ‘스펙 사회’ 라든지 ‘자기계발의 사회’ 라든지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는데 이런 진단들은 중요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특징을 지적해준다는 데에서 분명 의미가 있지요. 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이런 표현의 기저에 있는 정신구조가 무엇인지 보겠다는 거예요. ‘스펙 사회’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과거의 ‘학벌 사회’와 어떻게 다른지, ‘자기계발의 사회’라고 하는데 과연 우리에게 계발해야할 ‘자기’라는 것이 있는 것이지, 그 ‘자기’는 어떤 ‘자기’인가, 부모 세대의 ‘자기’와 같은 자기인가, 또 물어볼 수 있겠지요. 이런 것들을 더 분명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지요. 이런 관점에서 세대에서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으로서의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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