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땅콩집 사례와 관련한 쪽글 : 진리, 일리, 무리

  이 글은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네트워크 사회의 문화기획’ 수업(조한 혜정 교수님)에서 자공공아카데미 2강과 교수님께서 11월 7일 연세대학교 경청모임에서 ‘기도와 건강한 노동이 있는 삶의 회복’ 이라는 주제로 하신 강연을 토대로 작성한 쪽글입니다.  수업 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자공공 아카데미 게시판에도 같이 공유하고자 올려봅니다.


 

진리(眞理), 일리(一理), 무리(無理)

 

 법학과 4학년, 서민영

 

  수행자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어느 비구스님이 했던 고백을 기억한다. “출가란 이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샘물 같던 눈동자와 더없이 투명한 낯빛 때문이었을까. 영상을 본 것이 꽤 오래 전의 일이건만, 그 때 받았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깊은 참선의 경지로 침잠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구도자의 간절함에 그만 마음이 뭉클해지고 만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좋다. 그것이 붓다이건 혹은 기독교의 하느님이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돈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 기도하는 자의 영혼은 얼마나 가난한가. 자신의 생각과 힘이 부족함을 인정할 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기도는 존재의 불완전함을 자각하며 스스로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비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 모든 기도하는 자들의 진실한 발원(發願)은 더 이상 나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겸허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도와 노동이 있는 삶이란 바로 믿는바 대로 살아내는 삶을 회복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존 사회의 죽음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을까. 그리고 대학사회는 사회의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이 아프지만, 죽음의 정치는 캠퍼스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이제 학교를 떠날 예비 졸업생은 중앙도서관 앞에 붙은 대자보들을 바라본다. 대자보상에서 학내 민주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재수강 제도와 계절학기 송도이전이다. 많은 이들이 공분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내’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의 문제는 ‘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 문제에 대하여 주류 학생사회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는 듯 보인다. 청소노동자들은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교의 원천고용을 주장하는 집회를 연다. 길 가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배포되는 전단지를 받고 발언을 하는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잠시 멍하게 듣는 일 뿐. 그리고 나의 실천은 딱 거기까지다. 남을 돌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시대, 조합원들과 함께 서있는 친구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길을 돌아선다. 길을 가던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던 것은 내 목숨 보전만이 목적이 되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 답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는 자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새로운 윤리(Ethic)가 필요한 때다. 그러나 단순히 ‘함께 살자’를 이야기 하는 것과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자공공 아카데미에서 땅콩집을 중심으로 한 주택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닌 척 하려고 애썼으나 나의 상상력이 얼마나 ‘혼자’ 원칙에 제한되어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당장 졸업이 눈앞에 닥치자 어떻게 하면 독립을 할 수 있을지 머릿속이 먹먹하다. 신촌 주변의 부동산을 대충 훑어보아도 단칸방 전세가 육천만원을 훌쩍 넘는데, 혼자 힘으로 저축을 해서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멀고먼 꿈나라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현욱 선생님이 땅콩집에서 중요한건 ‘집’이 아니라 ‘함께’ 했다는 사실이라는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길이 막막해지면 기도를 하고 친구를 만들라는 조한 교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그래서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처음 독립을 생각했을 때에는 그저 이 한 몸 뉘일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족한건 그저 돈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택문제를 함께 고민할 ‘사람’, 그리고 ‘친구’다. 다음은 자공공 아카데미에서도 언급되었던 빈집의 지음이 경향신문에 한 인터뷰 글 중 일부다.

지음 – 독립이 뭔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독립이 단지 다른 사람과 같이 살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거라면, 자본이 엮어주는 관계로 살아가겠다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해요. 가족에게 돌아가라거나 독립과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고요. 억압적인 인간관계가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독립해야 하지만 자본 관계로부터 역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죠. 독립은 홀로 살기가 아니라 새롭고 진정한 가족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7252119155&code=210100&s_code=af118

 

  단순히 독립이라는 것을 원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말 그대로 ‘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공공 아카데미 수업과 타락이 보낸 메일, 그리고 지음의 인터뷰 글을 읽으니 독립이라는 말을 다시 다층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경청 강연에서 교수님은 새로운 가족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함께 사는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이미 공동주거생활을 경험한 이들이 들려주는 고충뿐만 아니라, 살을 비비며 산다는 것은 그에 수반한 갈등도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중대한 결심이다. 어쩌면 함께 모여 사는 것의 온기보다 갈등과 중재에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이미 내가 부유하는 개인으로서 충분히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함께 모여 살아야 하고, 그 속에서 관계를 배워나가는 것이 인격체로 성장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과정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 또한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은 아닐지 돌이켜 본다. 행여 아파 누웠을 때, 마음이 바닥을 칠 때 혼자서 그것들을 감당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은 또 어디 있으리오. 모여 살아야 아플 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쓸쓸한 존재끼리 등이라도 토닥여 줄 것이 아닌가. 타락의 말처럼 몇 년 정도 기간을 잡고 새로운 문화를 시도해 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커다란 울림이 될 것이다.

 

  이 때 새로운 가족은 어떤 이들이며 내 이웃은 누가 될 수 있을 것인가(Engagement). 사회 안전망이 파괴될수록 ‘내 가족’에 대한 집착은 자꾸만 커진다. 때로는 가족이 고슴도치가 되어 서로를 껴안을수록 마음에는 가시만 박힐 때가 많다. 나의 어머니는 야학활동을 못마땅해 한다. 취직이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 지금이 그걸 할 때냐고 묻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경청 강의에서 교수님은 정말로 어두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곳, 야학. 상상을 초월하는 어두움은 늘 학생들 곁에 있다. S언니는 와상장애를 가지고 있다.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언니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옆집에서 싸움이 날 때다. 언니는 늘 활동보조인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밤에는 활동보조인을 쓸 수 없다. 옆집에서 싸움이 나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봐 두렵단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은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불이 나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타락의 말처럼 내 이웃의 범주에 소외계층은 포함될 수 있을 것인가. S언니가 살고 있는 곳은 강서구의 어느 임대아파트. S언니에게 이웃이란 물리적으로는 벌집처럼 가까울지 몰라도 심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S언니의 두려움을 앞에 두고 그래서 나는 꺼내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가슴을 재생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위한 헌신(Excellence)일 것이다. 목사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리(一理)이며 내가 알고 있는 일리를 진리(眞理)라고 믿을 때 그것은 무리(無理)가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였듯 해답이 없기에 사회를 만드는 사람은 자기 아젠다를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을 내내 곱씹어 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가슴을 재생하는 일에 초심을 잃지 않는 작은 조각이 되면 진실로 다행일 뿐 지금 ‘무엇을 하겠다’, ‘무엇이 되겠다’라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편 이 때 사람들에게 정말로 기도가 필요한 것은 나의 일리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문처럼 많은 일리가 합력하여 이뤄낸 진리, 그것이 이 땅에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이제 필요한건 기도. 진실로 자신을 비워낸 온전한 기도다.

2 comments on “2강 땅콩집 사례와 관련한 쪽글 : 진리, 일리, 무리”

  1. 이윤주 응답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지음 님 인터뷰 내용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독립’이 관계망 없이 혼자살겠다는 것이라면, 자본에 기대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밖에 없을 거라는 것, 어쩌면 이번주 길종상가 인력사무소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아닐까요. 살면서 필요한 아주 기초적인 자립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돈을 내고 ‘전문가’를 불러 일을 해결해야하는데, 박길종씨는 살면서 배운 이런저런 모든 기술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돈을 받기보단 물건이나 식사를 함께 하면서 관계도 만들고, 새로운 교환가치도 만들어내고, 그런 점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토론 때 기도와 노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여기에 더불어 오늘날 사람들이 ‘자립기술’을 익히지 않는 것도 민영이 이야기한 것처럼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에 속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음… 적어도 한국적 맥락에서..?
    (첫 쪽글이 반가워서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ㅎㅎㅎ)

    • 서민영 응답

      이윤주 선생님, 귀한 코멘트 감사합니다 :)
      독립이라는 것의 의미를 재구성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자신만 놓고 돌이켜 봐도 말로는 ‘함께’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에 서투른 것이 현실이거든요.
      토론때 조한 교수님께서 박길종 선생님이 살아가는 방식이 당연한 일인데, 그것의 예외적인 일이 되어버렸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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