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읽을거리 : 내가 땅콩집을 짓는 이유 – 이현욱

내가 땅콩집을 짓는 이유 

 

완벽한 선물

 

“현욱아 일어나야지! 오늘 이사 가는 날이잖아? 네가 아주 좋아할 동네야. 개구리도 있고, 메뚜기로 있고 산에는 박쥐동굴도 많아. 어서 빨리 일어나.”

 

초등학교 4학년. 난 너무 좋았다. 태어난 후로 내내 아파트에 살다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는 날. 그날 아침이 아직 생생하다. 반포고속터미널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으로 2년마다 이사한 기억밖에 없는 나에게 단독주택은 나의 꿈이었다.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 날.

 

당시는 부모님은 강남개발에 발을 맞춰 2년마다 이사를 했다. 2년마다 좀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조금씩 생활도 윤택해졌다.

 

이삿짐을 다 싸고 출발해서 10분 만에 도착한 곳은 완벽한 시골 풍경. 집보다는 논, 밭이 많았다. 그런데 그곳도 반포였다. 반포에 이런 곳이 있다니 너무 놀랐다. 배산임수가 거꾸로인 동네. 남쪽에 산이 둘러싸여 있고 북측으로는 하천이 있어 개발이 어려운 동네. 학교를 가기 위해선 하천을 건너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다. 비가 오면 다리가 끊기니 학교를 갈 수 없었던 아주 훌륭한 동네. 학교가 파하면 흔들거리는 위험한 다리를 선생님의 인도 아래 조심조심 건너다녔다.

 

이른 저녁 5시 즈음만 되어도 박쥐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논, 밭에 개구리며 메뚜기가 지천이었다. 아파트놀이터가 전부였던 일상에서 그곳의 시간은 그대로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아빠! 너무 고맙고요. 게임기보다 훨씬 좋아요.”

 

동생은 이 동네가 너무 더럽다고 싫다했지만 나의 탐험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뒷동산을 올랐다. 웬 동굴이 그리 많은지 한 달을 꼬박 탐험해도 새로운 굴을 또 만날 수 있었다. 박쥐동굴, 여우동굴, 북한군동굴, 거지동굴.

 

 

30년 전 서래마을의 풍경

 

사실 아버지는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을 너무 미안해했다. 사업에 실패를 하고 아파트는 은행으로 넘어갔다. 학교를 옮기기 어려워 전세가 싼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결정한 것이다.

 

이사한 날 저녁, “1년만 고생하자. 빨리 회사를 일으켜서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가자”며 아버지는 다짐했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실패가 나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줄이야.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나는 인생 최고의 절정기를 보낼 수 있었다. 동생은 그 동네 사는 게 부끄러웠던지 학교를 빙글빙글 돌아서 갔다. 구름다리를 건너면 20분이면 갈 학교를 1시간을 걸었다. 나도 한 달인가 둘러 다니다가 동네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포기했다. 그 동네 친구들의 특징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티가 난다. 우선 콧물을 흘린다. 손톱에 때가 많다. 운동화가 아닌 고무신, 옷에 항상 흙이 묻었다. 이사 전에 학교 다니면서 이 친구들이 더럽게 왜 콧물을 흘리나 궁금했지만 어느 순간 이 친구들 옆에 똑같이 서서 콧물을 흘리며 같이 웃는 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변하는 게 당연했다. 온종일 추운 겨울에도 밖에서 뛰노니 코밑이 성할 리가 있겠는가. 흐르는 콧물을 연신 닦아내느라 오른쪽 팔소매가 항상 딱딱했다. 흙을 만지며 노니 옷에 흙을 것이고 손톱에는 때가 낄 수밖에 없다.

 

동굴탐험이 지겨우면 논에 가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다. 뒷다리가 어쩜 그리 맛있던지. 과자가 그리워지면 메뚜기를 잡아 구웠다. 가을이면 들판에서 깡통을 구해 불놀이를 했다. 이것도 지겨우면 들판이 아닌 뒷산에 올라가서 불놀이 하다 산을 홀라당 태우기도 했다. 그때 알았다. 왜 들판에서 불놀이를 하는지. 눈이 오면 쌀부대를 구해 눈썰매를 탔다. 이것도 지겨우면 플라스틱 파이프를 반을 잘라 앞부분을 불로 그슬려 구부린 다음 스키를 즐겼다. 논밭이 얼면 막대기를 하나씩 구해 아이스하키를 했다. 길 하나 사이로 생겨난 프랑스마을. 대화는 불가능했지만 같이 아이스하키를 하며 국가 대항전을 벌였다. 저쪽은 진짜 스틱. 우리는 그냥 막대기.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그날 저녁밥을 먹으며 “엄마 내가 프랑스를 이겼어.” 엄마는 무슨 소리냐며 고만 떠들고 밥을 먹으라고 성화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을까. 경제적으로도 그랬겠지만 아마도 부모님은 좌절과 절망으로 심리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으리라. 그런데 어린 나에게는 대단한 선물이었다. 돈은 없었는데 모든 게 공짜였다. 자연이 주는 무한한 선물.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1년은 어느덧 6년이 흘렀고 급기야 이민을 결정하게 되었고, 나는 아주 먼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그 재미난 것들을 다 놔두고 가려니 아쉽고 또 아쉬웠다. 좋은 장난감도 고급 과자도 없었던 어린 시절이지만 나에겐 추억이 한가득이었다. 구름과 개구리와 메뚜기, 친구들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아버지의 미안함은 나에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개발, 또 개발, 그리고….

 

지금은 여우동굴 자리에 대법원이 들어오고, 북한군동굴 자리에는 국립도서관이 들어섰다. 구름다리는 4차선 다리로 바뀌었고, 주변의 5층짜리 아파트는 40층 아파트로 재건축이 되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잔디가 깔렸고, 길 건너 프랑스마을은 고급빌라 단지로 동네 논밭도 고급빌라, 카페 촌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 동네에 갈 수가 없다. 너무 부자동네가 되어서.

 

다행이 대규모 아파트 재개발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저층주거단지를 아파트로 재개발하면 세대수가 늘어나고 주거환경이 좋아진다고 보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집이 고층으로 올라가 세대수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가구 수는 그대로다. 고층으로 올라가다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가 넓고 공원도 있어 주거환경이 쾌적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공간은 휴먼스케일이 아니다. 휴먼스케일이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공간이 있다. 이 크기를 벗어나면 안정을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불안정한 일상을 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트를 사서 집장만을 해도 내 집 같은, 온화함과 따뜻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 이사를 간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불편함과 같다.

 

땅콩집 전도사가 되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단독주택들은 사라졌지만 고급빌라들 사이로 골목길은 그대로다. 친구들과 축구하던 골목길. 구슬치기하던 놀이터도 남아 있다. 동네 빵집도 이름만 바뀌었지 그 상가 그 자리에 남았다. 쥐불놀이하던 우거진 뒷동산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졌다. 내가 불을 내 동네를 발칵 뒤집어놨던 그 언덕에서 내 아이들과 산책을 한다.

 

“한세야. 이곳이 아빠가 불장난한 곳이야!”

 

“오, 재미있었겠다. 나도 해도 돼?”

 

이 동네의 추억으로 땅콩집을 만들게 되었다. 그 추억 때문에, 『두 남자의 집짓기』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많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위해 학원을 보내지 말고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집을 지으라고 떠드는지 모른다. 아파트재개발, 재건축이 서울에 유일한 주거방식이 아니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매일 아침 힘들어 지친 나를 깨운다.

 

“현욱아, 일어나야지!”

 

(『서울문화』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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