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유창복 선생님이 보내주신 읽을거리입니다.

「서울 마을만들기 사업의 현황과 과제」에서

 

유창복

 

마을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공동체, 마을, 최근 많이 거론되는 화두이다. 시대가 하도 험하고 삭막하니 그 대안으로 거론될 법하다. 결혼을 미루고 홀로 살아가는 젊은이가 늘어간다. 결혼을 해도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애 낳기를 포기하는 부부가 늘어간다. 무연고 노인이 급증한다. 취업이 난망한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못하고,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스펙 쌓기에 정신없다. 고령화 사회로 이미 진입했지만 그 노인들을 돌볼 사회적 준비는 한참 부족하다. 이미 가족이 그 구실을 못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최소한의 생활안전망에 구멍이 숭숭난다. 형편이 좀 되는 사람들도 나름 수준을 유지하려 허덕이고 외롭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공동체, 마을… 매력적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동네에서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또래 아이들 같이 키우고 수다 떨며 생활의 어려움과 줄거움을 나누는 이웃, 상상만 해도 흐뭇하고 사람 사는 맛이 느껴진다. 한번쯤 떠올려본다. “나는 누구와 살아갈까?” 당장은 그냥저냥 살아간다 쳐도 “나이 먹고 힘빠지고 병들면 누굴 의지해 살아가나?”

하지만 두렵다. 공동체라는 말 그 자체가 주는‘무거움’을 어쩔 수 없다. 뭔가 내가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런 규율이 나를 강제하진 않을까, 아니 드러낸 규율은 아니더라도 은근히 압박해올 것 같은 분위기가 더 답답하고 숨막힌다,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 응당 해야 되는 의무방어전 같은 것이 많지는 않을까? 아니, 모처럼 쉬고 싶은데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 술 한잔 하자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많다던데 개인의 일상이 너무 노출되고 개인의 생활이 지나치게 방해받지는 않을지… 끝없이 이어지는 걱정과 두려움이 나를 가로막는다.

 

왜 마을인가? – 마을에 대한 추억

한여름 세탁소 앞 커다란 평상에 동네사람들이 모여앉아 있다. 세탁소 아줌마는 “쩍~!” 하며 반 뚝 잘린 수박 반덩이를 끌어안고, 벌겋게 잘익은 속살을 수저로 열심히 긁어내 옆 양푼에 옮겨 담는다. 세탁소집 아저씨는 어름 한 덩이를 그 양푼에 올려놓고 바늘을 대고 망치로 두들기며 잘잘한 어름조각을 만든다. 성질 급한 앞집 수퍼아저씨는 나머지 반덩이를 빼앗듯 가져다가는, 칼로 썩썩 썰어내 여러 개의 뾰족 조각을 만들어, 군침 흘리며 모여든 애들에게 나눠준다. ………… 금새 다 먹은 애들은 그 앞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한다. 좀 큰 머스매 한 놈은 조무래기들 데리고 쓰윽 빠진다. 비스듬이 서있는 까아만 전봇대에, 겨우 매달린 가로등 불빛이 채 닿을까 말까한 골목 한 켠에 모여앉아 귀신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평상에서는 수박껍데기를 뒤로 물리고 장기판이 벌어진다. 수퍼아저씨, 아까 수박 썰 때의 용맹은 간 데 없고 ‘한수만, 한수만’을 구걸하며 쩔쩔맨다. 그 앞에서 3학년짜리 꼬마는 코 파며 딴청 피우고 있다.

 

마을은 호혜적 생활관계망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나 어릴 적 세탁소집 막내아들 시절, 서울 변두리 미아리, 우리 집 앞의 풍경이다. 도시에서 자랐지만 나는 이런 살가운 이웃들 간의 정겨운 일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요사이‘마을만들기’라는 이야기가 마치 구호처럼 강조되고 있다. 심지어는 정부에서 더 강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을은‘만드는 것’이 아니라‘살아가는 것’아닐까? 누군가가 만들고, 만들 계획을 짜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닥친 생활의 문제를 하소연하고, 해결할 방법을 궁리하고, 함께 협동해서 해결해보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생활관계망이 바로 마을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원하는 생활자원을 얻을 수 있다. 이 사회는 돈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편리하게 조직되어 돌아가니 말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겐 조직이 있어서 필요한 생활자원을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도 저도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제 몸뚱아리 하나가 생활자원의 전부이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재능을 서로 나누어야 살아갈 수 있다. 이게‘마을’이다. ‘호혜적 생활관계망’이다.

 

다시 농촌마을로?

그 옛날, 도시가 생기고 블랙홀처럼 삶과 돈과 모든 것을 일거에 빨아들이기 전, 마을에서는…, 논에 물대러 장정들이 품앗이로 함께 들에 나가고, 새참바구니 머리에 이고 엉덩이 흔들며 들을 가로지르는 아낙들. 동네 어귀 정자나무 앞 평상에 모여앉아 ‘담배 세 개피’ 내기 장기 두다 ‘한 수만’, ‘일수불퇴’를 외치며 다투는 노인들. 그 앞에서 조잘대며 놀고 있는 동네 조무래기들. 머리 꽃 단, 이제 다 커버린 아이가 촐랑대며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닌다. 어느새 우물가에 모여든 아낙들, 동네의 온갖 소문이 뻥 튀겨져 교환되고, ‘아 글쎄, 그 여편네가 말이야…’ 각종 악플은 다 주렁주렁 거기 매달린다.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했던가, 똑똑한 놈 도시 간다고 다 고향 뜨고 모지라 남은 듯 의기소침해진 떠꺼머리 총각, 홀어미 모시며 동네 궂은 일 도맡는다. 그렇게 …. 모두 함께 살았다. 서로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스러지듯 힘없는 육신에 목소리만 카랑카랑한 노인도, 머리에 꽃 단 이도, 좀 모지란 떠꺼머리 총각도, 마을에서는 모두 제몫을 하고 살았다. 함께 돌보며 함께 위로하며 살았다. 마을에서.

마을하면 무엇이 떠오르냐는 질문에 그 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정자, 느티나무와 그 아래 시원한 그늘, 가마솥, 송아지, 산과 들, 실개천, 우물, 물레방아… 사람들은 공동체하면 시골의 마을을 떠올린다. 도시화 이전, 농촌에서는, 자녀를 내 새끼, 네 새끼 구별 안 했고, 우리 새끼로 함께 키웠다. 내 아이만 혼내지 않고 남의 아이도 혼내가면서 키웠다. 애들도 동네 어른들과 일상적인 관계를 맺었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자기 삶의 중요한 관계영역으로 보았다. 머리에 꽃 달고 다니는 이도 마을에서 함께 돌보았다. 기력은 쇠했지만 성깔 있는 할아버지도 동네에서 큰소리치며 어른 노릇하며 살았다. 그런 추억들이 있는 마을, 그것이 도시화 이전의 마을이었다. 이렇게 그 시대 마을이란, 세대가 함께 공존하면서 서로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마을공동체는 태어나면서부터‘주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공동체는 해체되고, 모두 개미떼처럼 도시로 몰려들어 따개비처럼 덕지덕지 떼지여 살지만 아래 윗집 누가 사는지 모른다. 어쩌다 주차 시비로 다투기라도 해야 옆 집 사는 이는 누군지 비로소 알게되는 형편이다. 모든 것이 제 가족 외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를 못 느끼며 살아간다. 그나마 가족이 유일한 공동체이다.

 

가족공동체

그렇다. 이웃의 누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뉴스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그런 외롭고 무서운 도시에서 가족이 유일한 안식처인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가족공동체는 자연의 섭리로 형성된다. 마침 제 눈에 맞는‘콩깍지’에 씌여,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시절을 보내고 나자, 사랑하는 이의 진면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수용적 관계’가 만들어진다. ‘개떡 같이 얘기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수용적 관계가 형성되고 나서야, 진실이 진실로 전달되는 공동체적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족은 자연의 섭리로 주어진다 치고, 도시의 익명적인 주민들과는 어떻게 수용적 관계를 쌓고 이웃이 되어 마을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 이제는 그 이웃들과 마음을 내어 접속하고 관계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쌓아가기 위해 ‘지지고 볶는 과정’을 서로 참아내야 한다. 결국 성미산마을의 역사는 제 새끼들 잘 키워보겠다고 모여서, 지지고 볶으면서 자기들이 커온 역사이다. 미리 조상으로부터 주어진 관계도 아니고, 콩깍지가 만들어주는 관계도 아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함께 견뎌내며 만들어가는 관계, 그것이 바로 도시 속 마을이다.

 

도시 속 마을공동체, 위험한 도약으로 시작된다

공동체(community)가 하나의 언어게임으로 닫혀있다면, 사회(society)는 최소한 두가지 인상의 언어게임이 마주치는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공동체는 겉으로는 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독백만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 사랑은 타자, 또 다른 공동체에 속한,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매력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랑이란 감정은 삶의 규칙이 다르기에 내가 정확히 알 수없는 ‘타자에 대해 위험한 도약 혹은 비약’을 감행하는 것. 인간이 고독한 독백의 세계를 벗어나서 불안하지만 풍요로운 대화의 세계로 뛰어드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가라타니 고진)

마을, 그 매력과 두려움. 그 사이 …, 고독한 독백의 세계를 벗어나 불안하지만 풍요로운 대화를 향한,‘위험한’ 도약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

 

마을만들기란 무엇일까?

마을을 두고 생각하는 마을의 지향이 다양하다. 거칠게 나누어보면 대체로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생태적 주거환경, 대면적/관계지향적 복지전달체계, 그리고 끝으로 민주적 마을살이.

 

생태적 주거환경

우선, 마을만들기를 ‘친환경적이고 공동체적인 주거환경 개선’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다. 무턱대고 새로 짓고 보자는‘삽질주의’행태에 대한 대안이다. 최근 정부 들어 부쩍 심해진 뉴타운 토건주의가 결국에는, 원주민들에게 주거환경의 개선이기보다는 정든 삶터에서 쫒겨나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와 두리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요사이 서울의 구석구석마다 뉴타운 주민들의‘사업 철회’운동이 거센 것을 보면, 그동안 거대한 토건주의의 무지막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손재주가 좋은 마을의 장인이 골목 어귀에 등을 달아 안전하게 밝힌다. 산동네 마을화가는 동네 애들과 함께 가파른 계단에 마을의 오랜 사연이 담긴 그림을 그리고, 그 계단을 오르내리는 주민들이 신기한 듯 그림을 살피게 한다. 골목담장에 벽화를 그려 동네골목을 갤러리로 변신시키는 등, 6,70년대 동네골목의 살가운 경관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다. 걸핏하면 부숴서 새로 짓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손봐서 쓰자는 것이다. 함께 살아온 주민들의 생활의 내력이 고스란히 묻어있어 정겹고, 살아온 기억을 되살리는 흔적이 아련한 그런 동네, 마을의 전통적인 건축물과 자연경관이 자랑스럽게 보존되는 마을.

 

대면적· 관계지향적 복지전달체계

국가기관이나 복지기관의 사무적인 복지전달 방식이 도마에 오른다. 정작 그 전달의 수혜자가 꺼리기까지 한다. 관이 지원하는 방과후센타에 아이들이 가기 싫어한다. 소위 낙인감 때문이다. 이렇게 관이 일방적이고 행정적으로 전달하는 복지자원의 배분이, 정작 수혜자의 마음과 필요는 세세히 살피지 못하는 모양이다. “주면 고마워 할 것”이라는 ‘주는 자’의 일방적인 입장은 아닌지.

대면적이고 관계지향적 복지전달이란, 지역에서 함께 사는 이웃들 간에 서로 돌보고 살피는 관계를 통해서,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생활자원을 전달하자는 취지이다. 또한 필요한 자원을 지역에서 스스로 모아내고, 지역에서 필요한 일을 지역 스스로 해결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응당 책임져야할 임무를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낌새가 있어 다소 염려된다.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모든 주민이 최소한의 생활에서 누락되는 이 없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가 아니던가? 따라서 국가는 복지자원을 더욱 많이 마련하고, 지역의 호혜적인 돌봄망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민주적인 마을살이, 생활의 필요를 협동적으로 성취한다

마을살이란, 자신의 생활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자신과 동일한 필요를 가진 이웃과 함께 협동하여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이 과정은 (돈이 없어) 시장에서 좌절하고 (관심 없는) 국가로부터 실망한 나머지, 스스로 해결해 가는 ‘삶의 필요’를 깨닫는 과정이다. 또한 나의 필요가 곧 이웃(타인)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함께 협동해야할 이유를 공감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협동은 대단히 번거로운 과정이다. 함께 한 이들의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와 공존하는 감수성을 몸으로 익히지 않으면 결실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협동의 진통을 견뎌내고 나면, 즉 협동의 성공적 성취는 협동의 위력과 가능성을 대번에 일깨워준다. 이는 나의 생활을 나의 힘으로 해결해나는, 그것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제거의 필요를 느끼고 과정이다. 정치란 무엇일까 내가 주인이고, 주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힘 아닌가. 바로 ‘주민주권’이다. 마을은 주민주권의 학습장이자, 실천장이다.

 

(‘시립대 발표문 2012.6.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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